바다와 자갈

Photo by Kim Dong Won
변산반도 궁항의 바닷가에서

내 아무리 바다를 사랑한다 해도
모래로 잘디잘게 부서져
바닷가에 몸을 누이진 않을 거다.
대신 나는 적당한 크기의 자갈로
바닷가에 내 자리를 잡을 거다.
아마도 모래로 부서져 바닷가에 자리를 잡으면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폐부 깊숙이 바다에 젖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모래로 부서지면 그때부터 입을 다물어야 한다.
파도가 쓸고 가는 바닷가엔 언제나 파도 소리만 가득할 뿐,
모래는 전혀 말이 없다.
그래서 난 가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때면
그 소리로 채우는 가슴이
채우면 채울수록 끝도 없이 넓어지다가도
모래가 잃어버린 그 침묵 때문에
갑자기 답답해지며 한주먹 크기로 줄어들곤 하였다.
난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자갈로
바닷가에 자리를 잡을 거다.
그리고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그 물결의 흐름을 타고 따르륵 따르륵 소리를 내며
바다를 굴러다닐 거다.
그래서 자갈이 깔린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밑에 자갈 소리를 한겹 엷게 깔아놓을 거다.
그렇게 나는 귀만 갖고 살지 않고
내 입을 갖고 살아갈 거다.
내 아무리 바다를 사랑해도
난 모래로 바닷가에 몸을 누이고
평생을 바다에 젖으며 아무 말없이 살진 않을 거다.
나는 자갈로 바닷가에 몸을 누이고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갈 때마다
따르륵 따르륵 소리를 내며 바다 속을 굴러다니고
그 소리를 “사랑해, 사랑해”라는 속삭임으로 삼고 살아갈 거다.

Photo by Kim Dong Won
변산반도 궁항의 바닷가에서

8 thoughts on “바다와 자갈

  1. 어느 겨울 눈이 꽤 많이 오던날 대전에 사는 친한 언니가 차를 몰고 저희집앞에 와서는 바닷가가자!!해서 무작정 갓 돌지난 아들아이를 안고 궁항 바닷가엘 갔었어요.
    그때 파도가 칠때마다 저 자갈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소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가끔은 그렇게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추억이 아름답게 남네요.^^

  2. 내 아무리 바다를 사랑한다 해도
    모래로 잘디잘게 부서져
    바닷가에 몸을 누이진 않을 거다
    .
    .
    .
    너무 좋네요…..
    자갈의 자존심이 너무 좋아요….

    1. 이번에 남해안으로 놀러갔다 왔어요.
      남해, 순천만, 여수 향일암, 고흥 나로도, 소록도, 보성차밭, 순천 송광사를 둘러보았죠.
      남해바다가 좋긴 좋더군요.

  3. 이스트맨님과 저는 일상이 180도 틀리네요~ㅋ
    전 두달이고 석달이고 방콕인데…물론 일땜에 그렇지만….
    후배작가들이 저한테 버섯이나 곰팡이 날거 같다네요…ㅋㅋ

    1. 뭐, 비슷한 것 같은데요.
      저도 원고나 번역 시작되면 그냥 집구석에서 거의 꼼짝도 안해요. 대문도 안나간다는… 근데 요즘은 집사람이랑 자전거타러 야밤에 한강에 나가곤 했었죠.
      그리고 때로 일 끝나면 어디론가 줄행랑을 놓긴 하죠.
      옆에서 집사람이 ‘때로’가 아니라 ‘거의’ 그렇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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