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재편 — 차주일의 신작시 다섯 편

차주일,
『현대시』 2011년 5월호에 실린 사진을 재촬영

1
때로 시인들은 시각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려 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우리의 세상에선 겨울이 오면 날씨가 가라앉고 그러면 호수에 얼음이 잡힌다. 봄까지 그 얼음은 풀리질 않는다. 봄이 오면 날씨가 따뜻해지고 그러면 호수의 얼음이 녹는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일반적 질서이다. 그 질서는 누구도 뒤흔들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 보인다. 그런데 시인은 그 질서를 뒤흔들려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차주일의 시집 『냄새의 소유권』에서 시 한 편이 그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 준다.

호수는 알처럼 두꺼운 껍질로 얼어 있고
물은 세포를 증식하는 수정란처럼 분주하다
얼음호수를 품는 겨울, 어느 체온처럼 포근하기에
물은 어느새 부리를 만들어 껍질을 쪼는 것인가
물과 봄볕이 줄탁하는 소리 들으며 균열을 바라본다
—「눈의 궤적」 부분

차주일의 시각 속에서 얼음으로 덮여있는 호수는 거대한 수정란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그 수정란을 달걀이라고 구체화해보자. 그러면 호수에 덮인 얼음은 달걀 껍질이 된다. 시인이 재편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이제 알을 품어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닭의 자리는 계절 겨울의 몫이 된다. 겨울이란 말하자면 얼어붙은 호수를 그 품에 품어 생명으로 부화시키는 계절이다. 그렇다면 겨울은 따뜻한 계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뜻한 체온을 갖지 못한다면 알의 부화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춥다. 이 때문에 시인이 구축한 재편된 세상과 실제 세상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 시인도 그 괴리에 대해 알고 있다. 시인이 겨울이 따뜻하다고 못박지 못하고 겨울이 “어느 체온처럼 포근하기에” 봄을 부화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이 부분을 의문형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얼어붙은 호수 아래쪽의 물은 달걀 속에서 생명으로 잉태되는 병아리가 된다. 때문에 그 물은 부리를 갖는다. 봄이 오면서 어미닭의 자리는 겨울에서 봄볕으로 대치된다. 얼음이 녹고 갈라지는 것은 그 얼음 속의 물과 바깥의 봄볕이 서로 껍질을 쪼아 깨뜨리고 바깥으로 나오는 생명 탄생의 몸짓이다.
이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변화로 보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 속에선 대개 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인식 속에선 겨울과 봄이 대결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 대결에서 겨울이 패배하고 봄이 이기면서 계절이 바뀐다. 그러나 겨울이 봄을 잉태한다는 인식 구조 속에선 그러한 대결이 소멸된다. 겨울과 봄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이는 세상을 보는 시각의 근본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각 변화를 통한 세상의 재편이 갖는 미덕이 무엇일까. 대결은 피곤을 부른다. 반면 생명의 잉태는 사람들에게 환희가 되는 법이다. 따라서 세상을 지배하는 정서가 달라지게 된다. 차주일의 시에선 시각 변화를 통한 세상의 재편이 종종 눈에 띄며, 그것이 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의 하나이다. 나에게 건네진 다섯 편의 신작시를 마주한 나는 바로 그 즐거움으로 그의 시를 읽어나갔다.

2
첫번째로 살펴볼 시는 「착근」이다. 시의 서두에서 우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씨앗’을 만난다. 그 씨앗은 “강마저 허리를 뒤채 새 물길로 돌아눕는 태풍”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킨 “볍씨 한 톨”이다. 그러나 차주일의 시각 속에서 씨앗의 뿌리는 그림자란 말로 바뀐다. 그에 따라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일은 “그림자를 심는” 일이 되며, 뿌리는 “땅을 쥐려는 그림자의 손가락”이 된다.
시인의 눈에 볍씨는 땅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땅에 찰싹 붙어 있는 듯이 보인다. 시인은 그 모습에서 어미의 손을 놓치고 길을 잃었던 아이의 모습을 본다. 한번 부모의 손을 놓쳐본 아이는 더더욱 부모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볍씨 또한 땅의 손을 놓친 적이 있다. 물길을 바꿔놓을 태풍이 있었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헤어져 있는 간격”이 “지평선에 달라붙어 있는 그림자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림자가 지상으로 눕는 것이 손을 놓친 과거에서 온 것이며, 아예 땅속을 파고 들어 땅을 쥐려는 뿌리, 즉 씨앗의 그림자는 그런 측면에서 더더욱 강렬한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주일이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씨앗을 통하여 보여주는 시각의 재편은 씨앗에서 그치질 않는다. 「착근」에선 시각의 재편이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씨앗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다.

씨앗껍질 같은 늙은 얼굴에서 사지가 뻗쳐 있다.
일생을 거쳐 비로소 발아를 마친 저 씨앗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길 끝을 바라보는 저 씨앗은,
길 끝에 이르러 등반가처럼
낭떠러지로 제 그림자를 버리고 소리를 얻을 것이다.
—「착근」 부분

사지를 가졌다고 했으니 분명 사람일 것이며, 늙은 얼굴을 가졌다고 했으니 나이든 노인일 것이다. 노년은 생을 마감하는 시기이다. 그러니 씨앗이라는 말에는 어울리질 않는다. 그런데도 차주일은 노년의 삶에 씨앗의 자리를 할애한다. 노년은 그의 눈에 “일생을 거쳐 비로소 발아를 마친” 씨앗이다. 아마도 시인은 길을 가다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길 끝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한 사람 본 듯하며 그 노인의 모습에 씨앗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산을 오르는 등반가를 떠올리며 노년의 모습을 삶을 등정하는 등반가의 모습과도 겹친 것이 아닌가 싶다. 산에선 햇볕의 방향에 따라 때로 그림자가 마치 씨앗의 뿌리처럼 아래로 향할 수 있다. 노인의 모습에 등반가의 모습을 겹치고 다시 씨앗을 상상하는 시인의 머리 속에서 그 모습도 그려지지 않았나 싶어진다.
이러한 인식 구조 속에 노년을 세워 씨앗으로 삼게 되면 더 이상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지 못한다. 죽음이 가져가는 것은 삶이 아니라 씨앗 껍질에 불과하다. 씨앗이 새생명으로 다시 자라면서 그냥 껍질 하나를 죽음에 내주듯이 노년이 죽음에 내주는 것 또한 삶이 아니라 사실은 그냥 껍질에 불과한 몸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노년의 삶을 그런 구조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삶에 대한 사랑에 더 가깝다고 보는 듯하다.
두번째로 살펴볼 「침묵 연주가」에선 숨이 곧 침묵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시인은 우리의 숨에 침묵이 배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숨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모두가 침묵 연주가인 셈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선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뱉는 숨은 “기어코 발설해야만 하는 침묵”이 된다.
숨이 곧 침묵이란 구도는 곧바로 방향을 뒤집어 침묵이 곧 숨이라는 역방향의 구도를 형성한다. 그 역방향의 구도 속에선 아무 말없이 서 있는 나무에게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침묵이 곧 숨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숨 속에 어떤 음가가 배어 있다고 느끼며, 때문에 나무 아래 섰을 때 슬픈 노래를 듣기도 한다. 시인의 귀가 매우 섬세하여 침묵에 담긴 노래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리라.
숨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숨이 되는 이 구도의 놀라운 점은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목숨이 다했을 때 숨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이 열린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들로부터 숨을 거두어가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영원히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음이 우리에게 안긴 침묵은 이러한 구도 속에선 영원한 숨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침묵이 죽음의 뒤를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어놓는다.

한 사람에게 우연히 불리기 위해 지어진 노래;
침묵은, 얼마나 완전한 슬픔인가.
침묵이란 미완성곡을 완창하면
펜촉에 고인 시간은 내가 부를 사후가 된다.
—「침묵 연주가」 부분

인생을 마칠 때, 단 하나의 후회도 없이 삶을 완결짓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모든 삶은 미완성곡이며, 죽음은 그 노래의 완창이다. 그러나 죽음이 끝은 아니다.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 속에선 숨을 쉬며 말을 하고 떠들 때 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이지만 차주일의 구도 속에선 침묵이 숨이어서 죽음 뒤는 “내가 부를 사후”의 노래가 된다. 아울러 그것은 “감은 눈으로만 감상할 수 있는 추억”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박자표가 성역을 넘는 법」은 계절의 정서에 대해 얘기를 한다. 시인의 시각에 따르면 가을은 두 개의 정서를 가진 계절이다. 그 중 하나가 ‘환희’이다. 그러나 환희는 일반적으로는 가을의 정서라기 보다 봄의 정서이다. 가을은 생명이 마감되는 계절이며, 그런 측면에서 환희보다 쓸쓸함을 부른다. 시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계절의 순서에 주목할 때 가을의 뒤는 봄이 아니라 겨울이 잇게 되며, 그 겨울이 가장 먼저 부르게 되는 반응은 아직 봄까지는 가야할 길이 멀다는 인식이다. 그리하여 가을에 섰을 때 사람들은 “가을을 갈 길이 멀다는 노래”로 듣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때 가을의 정서는 환희보다는 ‘비통’의 지배를 받게 된다. ‘빈주먹’을 쥐고 그 겨울을 넘겨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 비통의 무게가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가을의 정서를 환희로 바꾸려면 가을을 곧바로 봄으로 이어놓아야 한다. 시인은 그것을 계절의 순서에 주목하지 않고 흔히 결실의 계절로 통하는 가을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열매에 주목하는 것으로 실마리를 잡아내고 있다. 시인의 눈에 열매는 열매이자 곧 씨앗이다. 열매는 가을의 몫이지만 씨앗이 되면 봄의 몫이 된다. 따라서 씨앗으로 바뀔 수 있는 열매의 특성에 주목하면 계절의 순서에 붙잡혀 있을 때 비통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을의 정서가 환희를 예비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을은 환희와 비통 사이에서 흔들”린다. 계절의 순서에 주목할 때는 가을의 정서가 비통 쪽으로 완연하게 기울지만 열매에 주목하여 그 정서를 흔들어놓으면 그때의 가을은 우리들의 마음이 기우는 방향으로 ‘첫발’을 내줄 여지가 생긴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겨울을 건너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지구가 여섯 계절을 가진 주사위처럼 구르”고 있어 계절도 종잡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계절의 순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을의 뒤에서 겨울이 오며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리고 그러면 우리는 그 눈길을 밟으며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가을을 곧바로 봄으로 잇는 이러한 구도 속에선 계절을 대하는 정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서가 바뀌면 겨울을 지나는 우리들의 ‘발자국’은 힘겨운 계절을 넘는 고난의 걸음이 아니라 노래를 예비하는 ‘박자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 속에서 봄으로 가는 길은 겨울을 이기고 맞게 계절이 아니라 “열매가 표정을 지우고 씨앗으로 도착”할 때쯤 맞는 계절이 된다. 물론 시인이 내준 이 길은 일반적인 길은 아니어서 매우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그 낯섬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앞에 새로운 ‘성역’이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편의 시에서 구도의 재편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고 있다. 가령 「착근」은 노년의 삶을 씨앗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다만 껍질 하나를 잃는 것 뿐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침묵 연주가」 또한 숨과 침묵을 환치시킨 구도를 통하여 죽음의 뒤를 닫지 않고 열어놓는다. 「박자표가 성역을 넘는 법」은 가을에서 봄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여정은 힘겹게 겨울을 넘겨야 하는 기존의 여정과 달리 그 길에서 환희를 예비한다.
그러나 「지옥도를 찍는 사진작가」는 양상이 다르다. 시인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적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유리창으로 치장한 화려한 건물들이 보이는 도시이다. 그러나 그 유리창은 차주일의 눈에 ‘위장’, 즉 뱃속이다. 그의 눈에 도시의 건물은 ‘어항’이 되고, 그 속의 사람들은 “어항 밖을 바라다보는 인면어들”이며, 사람들은 도시의 건물이란 위장 속에서 “창문을 옮겨 다니며 소화되고 있다.” 시인이 구성한 이 구도 속에선 우리들은 도시에서 편리하고 윤택하게 생활하며 살아가고 있다기 보다 도시가 먹고 소화시킨 뒤 버리는 시간의 배설물이 되고 만다. 구도의 재편이 항상 길을 열어주진 않는다. 때로 구도는 우리들의 실질적 모습에 대한 폭로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밥의 각도」는 차주일의 시가 어떻게 시각의 변화에 따라 세상의 구도를 재편하고 있는지에 대한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를 읽어보면 우리는 프랑스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개선문과 더불어 새로운 개선문이 또 있으며, 그 새 개선문의 이름이 ‘라 그랑드 아르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 두 개선문의 “뒷길 언저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통을 걷어차고 가는 늙은 흑인 하나를 본다. 시인은 한 입 먹고 버린 그 쓰레기통 속의 햄버거 가격이 아프리카 차드 공화국에 사는 어느 소년의 “한 달 식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그 풍경은 프랑스의 한 미술관을 찾아 명화 앞에 선 시인의 시각을 간섭한다.

차드 소년의 버려진 한 달 식비를 은폐하며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작을 감상한다.
‘만종’ 속 부부가 고개 숙인 각도 앞에서
굶주린 배를 내려다보는 소년의 고개 숙인 각도를 외면한다.
‘이삭 줍는 여인들’의 허리 각도 앞에서
쓰레기통에 상체를 처박은 늙은이의 허리 각도를 외면한다.
—「밥의 각도」 부분

차주일은 명화를 통하여 열리는 세계가 다른 세상에 대한 외면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갖는 시선의 각도를 “밥의 각도”로 낮춘다. 그리고 그가 낮춘 밥의 각도에서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정화수 앞에서 손을 모았던 이 땅의 어미들이 보이고, 노예선에 실려 끌려가면서도 허기를 토해내 아이를 살리려 했던 흑인 어미가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시인은 서구 사회가 부르짓는 “평등한 박애”가 그들이 데려와 혹사시켰던 노예의 삶을 은폐하는 그들만의 시각임을 폭로한다. 서구 사회를 문명 사회로 바라보는 시각은 알고 보면 그러한 밥의 각도를 결핍한 시각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 문명 사회의 한가운데서 시인은 그들의 시각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이 은폐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3
시각의 변화란 것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는 해명하기가 어렵다. 가령 씨앗의 뿌리를 그림자로 보는 시각의 변화는 차주일이 세상의 구도를 재편하는데 있어 첫걸음이 되어주긴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짐작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다만 그가 “그림자를 버릴 수 없는 평지”라고 한 말에서 실마리를 잡아 그림자에서 우리가 버리를 수 없는 어떤 수평의 운명을 생각해볼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여 수직의 운명을 개척할 때 뿌리가 생명을 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짐작해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의 변화가 어떻게 오는 것이든 차주일이 시각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을 재편하면 세상이 새롭게 열리거나 은폐되어 있던 세상의 모습이 폭로 된다. 그의 시를 읽을 때의 즐거움이다.
(『현대시』,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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