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심연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5월 1일 경기도 두물머리의 클라라 커피에서

모든 커피는 심연의 깊이를 갖고 있다.
커피가 검은 것은 그 때문이다.
심연은 깊어서 검지만
깊이라곤 잔의 깊이밖에 가질 수 없었던 커피는
색을 내세우고 그 색에 심연의 깊이를 담았다.
우리는 가끔 어두컴컴한 심연을 꿈꾼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어두워지는 것이 심연인데도
우리는 그 심연의 아래쪽 깊은 곳에서 오히려 빛을 꿈꾼다.
심연은 바닥까지 가보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이다.
가끔 커피가 우리 앞에 깊은 심연으로 놓인다.
처음 바리스타에게서 건네받았을 때,
그 심연은 가장 깊고 어둡다.
한모금 마시면 그 심연은 바닥을 향하여 낮아지면서
더 어두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을 우리에게 맡기고 투명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심연의 어둠을 모두 마셔버렸을 때
드디어 우리에게 그 바닥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나도 가끔 커피를 마신다.
대부분은 커피잔의 바닥을 보지만
어느 날엔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가끔 나는 심연의 어둠 속을 헤엄쳐
그 바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모두 내 속으로 들이킨 뒤
드디어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좋은 바리스타가 내주는 커피 한잔은
때로 그냥 커피가 아니라
내게는 마시면서 바닥에 이르는 깊은 심연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5월 1일 경기도 두물머리의 클라라 커피에서

6 thoughts on “커피와 심연

  1. 그 심연의 바닥에 남은 찌꺼기는 본디 내것이었을까요? 아님, 심연의 깊이를 마주한 나에게 주는 커피의 마지막 토설물이었을까요? 트위터에서 가끔뵙던 @wonminmoon 입니다. 정말 멋진 글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동원님이 마신 커피향처럼 정말 오래 오래 갈 것 같습니다… ^^

  2. 커피 아카데미 가는 길 지하철에서 읽고 흔적 남겨요.
    커피는 배우면 배울수록 알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커피의 심연과 저의 심연이 아득하기만 하네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1. 요즘 커피 배우러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커피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커피에 대해 무지 많이 쓰는 듯 싶어요.
      클라라 커피집 바깥분이랑 커피 얘기하고 있으면 상당히 재미나더라구요.
      그런데 이 집 바깥분도 커피를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3. 손님은 바리스타를, 바리스타는 손님을 잘 만났군요.
    커피와 바리스타에게 바치는 최상의 헌사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집에서 조금 마시고 왔지만, 아무래도 한 잔 더 내려서
    심연을 확인해야겠어요.^^

    1. 이 집 커피는 좀 신비롭기까지 한 거 같아요.
      마실 때마다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오르게 만들어요.
      심연의 바닥에 이르시면 그 풍경좀 나중에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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