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커피는 심연의 깊이를 갖고 있다.
커피가 검은 것은 그 때문이다.
심연은 깊어서 검지만
깊이라곤 잔의 깊이밖에 가질 수 없었던 커피는
색을 내세우고 그 색에 심연의 깊이를 담았다.
우리는 가끔 어두컴컴한 심연을 꿈꾼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어두워지는 것이 심연인데도
우리는 그 심연의 아래쪽 깊은 곳에서 오히려 빛을 꿈꾼다.
심연은 바닥까지 가보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이다.
가끔 커피가 우리 앞에 깊은 심연으로 놓인다.
처음 바리스타에게서 건네받았을 때,
그 심연은 가장 깊고 어둡다.
한모금 마시면 그 심연은 바닥을 향하여 낮아지면서
더 어두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을 우리에게 맡기고 투명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심연의 어둠을 모두 마셔버렸을 때
드디어 우리에게 그 바닥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나도 가끔 커피를 마신다.
대부분은 커피잔의 바닥을 보지만
어느 날엔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가끔 나는 심연의 어둠 속을 헤엄쳐
그 바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모두 내 속으로 들이킨 뒤
드디어 심연의 바닥에 이른다.
좋은 바리스타가 내주는 커피 한잔은
때로 그냥 커피가 아니라
내게는 마시면서 바닥에 이르는 깊은 심연이다.
6 thoughts on “커피와 심연”
그 심연의 바닥에 남은 찌꺼기는 본디 내것이었을까요? 아님, 심연의 깊이를 마주한 나에게 주는 커피의 마지막 토설물이었을까요? 트위터에서 가끔뵙던 @wonminmoon 입니다. 정말 멋진 글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동원님이 마신 커피향처럼 정말 오래 오래 갈 것 같습니다… ^^
아, 오블에 블로그도 갖고 계시군요. 놀러갈께요.
커피 아카데미 가는 길 지하철에서 읽고 흔적 남겨요.
커피는 배우면 배울수록 알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커피의 심연과 저의 심연이 아득하기만 하네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요즘 커피 배우러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커피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커피에 대해 무지 많이 쓰는 듯 싶어요.
클라라 커피집 바깥분이랑 커피 얘기하고 있으면 상당히 재미나더라구요.
그런데 이 집 바깥분도 커피를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손님은 바리스타를, 바리스타는 손님을 잘 만났군요.
커피와 바리스타에게 바치는 최상의 헌사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집에서 조금 마시고 왔지만, 아무래도 한 잔 더 내려서
심연을 확인해야겠어요.^^
이 집 커피는 좀 신비롭기까지 한 거 같아요.
마실 때마다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오르게 만들어요.
심연의 바닥에 이르시면 그 풍경좀 나중에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