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의 여름 끝무렵,
그녀와 함께 남해로 여행을 갔었다.
여행 첫날,
노부부가 단 둘이 살고 있는 민박집에 묵었다.
눈을 붙이려 누웠을 때
귓전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집의 바깥으로 어디나 풀밭이었다.
풀밭이 풀벌레를 키우고,
그 풀벌레가 풀밭에 소리를 가득 채워놓는 곳이 그곳이었다.
단독 주택에서 상당히 오래 살았다.
그곳에서도 갖가지 소리가 있었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구옥에서 살았던 터라
골목의 온갖 소리들이
거의 아무 제지없이 집안으로 뛰어들곤 했다.
그녀가 바깥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그녀는 자동차 소리를 먼저 집안으로 들여보내
자신이 왔다는 것을 내게 알렸다.
풀벌레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도 풀밭은 없었다.
문밖은 어디나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다.
아파트 8층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는 그녀가 차를 몰고 돌아와도
자동차 소리를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골목을 걸어가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떠들던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많이 조용해졌다.
조용해 졌다는 것은 알고 보면
소리를 잃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용해진 대신 소리를 잃어버렸다.
소리를 잃어버린 아파트 8층에선 창문을 열면
그곳은 곧바로 아득하게 아래로 꺼지는 허공이다.
설친 잠으로 새벽녘에 눈을 뜨고 말았다.
아직 바깥은 어둠이다.
어둠을 방치한채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아파트 8층에서도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풀밭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서린 아파트 8층의 바깥쪽 허공에
풀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울며
그 울음 하나에 풀 하나,
그 울음 둘에 풀 둘을 심어가며
푸르른 풀밭을 펼친다.
시골에선 풀밭이 풀벌레를 품어 소리를 거두고
도시의 아파트에선 풀벌레가 울어 허공에 풀밭을 펼친다.
4 thoughts on “풀벌레 소리”
같은 강동구민이시군요. 반갑습니다. ^^
풀벌레소리를 검색하다 이렇게 들렀습니다.
그 어떤 음악보다 자연의 소리만큼 아름다운 음악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반갑습니다.
80년에 천호동으로 이사와서 계속 살다가
잠시 3년 정도 다른 곳에서 살고는
그 뒤로 다시 천호동에서 살고 있어요.
거의 천호동에서 눌러지낸 셈이죠.
방문 고맙습니다.
저희는 요즘 새벽부터 밤까지 베란다 방충망에 매미가 날아와 요란하게
울고 가곤 하는데, 매미의 방문은 아직 없었나요?
아파트 생활에 적응해 가시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저도 아파트에 처음 이사했을 때, 뭔지 모를 고요와 적막감을 느끼곤 했지요.
매미 소리는 멀리 들리곤 해요.
아주 듣기에 좋을 정도로요.
어제 뉴스에 보니 요즘 시끄러운 말매미가 많아져서
거의 소음 수준이라는 보도가 나오더군요.
시골 살 때는 매미가 시끄럽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데
서울에선 소리가 아파트 벽에 부딪쳐서 증폭이 되는 바람에
매미도 시끄러운 존재가 되버렸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