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장릉에서의 휴식 – 영월, 정선 기행 12

여행이 꼭 돌아다니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때로 한곳에 주저앉는 것이 여행이기도 하다.
여행 마지막날의 오후에 우리는 영월의 장릉에 주저 앉았다.
장릉의 잔디밭에 돗자리를 폈으며
나무가 드리워준 그늘 속에서
시간이 바람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릉을 둘러본 것이 아니라 그냥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어릴 적의 장릉은 사실 구경가는 곳이라기보다
가서 쉬면서 노는 곳이었다.
장릉은 단종의 능이 있는 곳이다.
매년 그곳에서 단종의 슬픈 삶을 달래는 단종제가 열리곤 했지만
항상 우리의 걸음은 그곳에 갈 때면 놀러가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우리는 그곳에 가서 오후의 시간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며 놀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풀밭 위의 식사가 아니라 풀밭 위의 휴식이다.
종명씨는 아예 돗자리 위에 누워 눈을 붙였다.
언듯 휴식도 그림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난 카메라를 갖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연못이 눈에 띄고 연못 속에서 연꽃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에도 있었던 연못 같다.
렌즈를 50mm 표준 렌즈만 끼워 갖고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연꽃을 찍기에는 무리다.
능을 나가서 105mm 렌즈를 가져왔다.
105mm 렌즈는 연못의 가운데 있는 연꽃을 내 눈앞으로 꺼내주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하늘의 구름이 좋은 날이었다.
그 구름이 연못까지 내려앉았다.
트위터 친구 길혜음님은 이 사진을 보고
하늘연못에 연잎구름이 떠있다고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옆으로 개울 하나가 흘러간다.
들어올 때 보니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들어가고 그 시원함으로 친구를 유혹한다.
영옥씨가 그 유혹에 넘어간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영옥씨와 그녀는 오랜 친구이다.
우리들은 결혼하기 전부터 만나 결혼할 때마다 서로의 결혼식을 찾았었다.
모두 넷이었는데 이번 여행에는 둘만 함께 했다.
사진을 찍을 때 애들처럼 장난을 친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옛추억이 많은 곳이라 기억을 더듬어 보려 장릉으로 올라가 보았다.
능은 예전 그래로인 것 같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달라져 있었다.
능의 바로 옆으로 잔디로 덮인 가파른 경사면에
그냥 턱이 지게 흙을 깎아 만들어놓은 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예전의 잔디 계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능에서 내려다보니 버드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많이 낯이 익다.
이곳의 나무를 다 눈에 익혀놓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버드나무는 오래전 어렸을 적에 본 적이 있는 듯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능에서 전각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 본다.
둥근 우물안에 사각의 하늘이 담겨 있다.
하늘은 둥근데 우물안에선 사각으로 반듯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연못엔 잉어가 여러 마리 살고 있었다.
유유자적 연못을 떠돌다 가끔 수면 가까이 주둥이를 내밀고
담배피듯 공기 방울을 뻐금거렸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영옥씨와 그녀가 공기 놀이에 나섰다.
나무 밑에 떨어진 도토리가 공기가 되었다.
도토리는 돗자리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저리로 덱데굴 굴러다녔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장릉에서 한참 휴식을 취한 뒤에 서울로 출발했다.
중간에 이천으로 나가
종명씨의 영특한 아들 영기가 검색하여 찾아낸 쌀밥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맛난 쌀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반찬이 푸짐한 집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9월 13일 강원도 영월에서

밥마다 콩 세 개가 들어있다.
콩이 세 개 들어 있었지만
밥알이 콩콩콩 뛰지는 않고 아주 찰지고 맛있었다.
콩이 선동해도 쌀밥은 그에 넘어가는 법이 없다.
두 집의 추석 여행은 맛난 쌀밥으로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막히지 않았으며 돌아오니 집이 아늑했다.
여행은 여행의 즐거움을 주는 한편으로
돌아올 때면 집에 대한 아늑함도 아주 깊게 챙겨준다.

10 thoughts on “영월 장릉에서의 휴식 – 영월, 정선 기행 12

  1. 엄훠~
    엊그제 놀러나가서 애들아빠하고 공기놀이 했는데
    eastman님 블로그 보고 따라한줄 알겠어요..ㅋㅋㅋ

    놀멘놀멘… 쉬는 여행… 대 찬성이에요..^^

    1. 도토리 공기알이 의외로 재미나더라구요.
      어찌나 이리저리로 굴러다니는 지요.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구르며 웃음주는 아이들 때문에
      많이 행복하시죠.
      슬쩍 우리도 그 행복에 끼어들고 싶은데 왜 이렇게 인연이 안닿는 거죠.
      가끔 블로그에서 아이들 커가는 모습만 봐도 흐뭇하긴 해요.
      아이들에게 무지무지 사랑하는 털보 아저씨랑 아줌마가 있다는 거 전해 주세요.

  2. 위 연꽃 사진 중, 아래 사진(연꽃 두 송이에 잔 잎이 많은 사진)이 더 많은 말을 걸어와 어줍잖은 댓글을 달아봤습니다. 멋진 옷에 값싼 악세사리 같은 글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김동원님의 사진과 글은 정말 멋집니다. 다른 연꽃 사진 뿐만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좋은 사진들 많이 올려주세요. 혹시 압니까? <사진이 말을 걸어오다>란 제목으로 작품집이 나올지도 모르죠. 여러가지로 감사합니다. 사진을 보며 글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1. 저보고 찍어붙이기의 명수라고 하기도 해요. 사진은 별로인데 그럴듯하게 붙이는 말로 한몫본다고.. ㅋㅋ
      좋은 댓글로 블로그가 풍성해지는 듯 싶어요. 감사드립니다.

  3. 풀밭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진은 마네와 쇠라의 그림이 결합된 것처럼 보여요.
    안정된 분위기에서 편한 모습이 느껴지는 힘 있는 사진 같아요.
    이천 쌀밥은 앞으로 세콩밥이라 불러야겠습니다.^^

    1. 돌아다니지 않고 이렇게 앉아서 쉬는 것도 참 좋은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그늘있고 잔디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장릉으로 갔는데 시골이 동네마다 이런 곳은 하나씩 다 있는 것 같아요.
      세콩밥은 탁월한 작명이십니다.

  4. 감성을 자극하는 <연꽃과 연잎> 사진

    연꽃과 연잎을 본다. 수학 방정식을 풀 때처럼 같은 글자 ‘연’을 빼내면 ( ) 속에 (꽃+잎)이 남는다. 잠시 꽃과 잎에 생각이 머문다. 누군들 ‘꽃’이 되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우리 모두 ‘꽃’이 될 수는 없다. 잎이 없는 꽃은 하나의 정물일 뿐, 아름다운 풍경화가 될 수 없듯이. 나도 그대에게 ‘잎’이 되고 싶다. 아니, 보이지 않는 꽃대궁이 되어도 좋다. 당신을 빛내고, 당신을 받쳐줄 수만 있다면 내 행복은 그 뿐. 심연 속에 잠겨있는 구름처럼, 한줄기 바람에도 흔들릴 깃털 같은 사랑이지만 어쩌랴. 나 오랜 시간 그대 속에 침잠해 있음을. 오늘은 한줄기 소낙비라도 내렸음 좋겠다. 연잎 우산을 들고 영희와 철수처럼 달리고 싶다. 시간 속으로, 추억 속으로.

    1. 요 댓글에 어울리는 연잎의 사진이 하나 있어요.
      아무래도 선물로 추가해야할 듯 싶어요.
      연의 줄기가 물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사진이죠.

    1. 주방장님 근처에 있는 서울여대도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조경도 잘해놓은 것 같구요.
      놀러내려간 길이라 장릉의 저희는 좋을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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