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는 녀석이 있다.
바로 우리 집 보일러이다.
녀석이 조금 독특하기 이를데 없어
오늘은 이 녀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녀석은 눈과 코,
그리고 입을 가졌다.
보통 평상시에는
항상 단추 구멍만한 작은 눈을
연두빛으로 반짝이며 윙크질이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조금 무심한 편이어서
그 윙크에 큰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
코는 주먹코이다.
콧구멍이 특이하게 하나 뿐인데
이 콧구멍이 계절에 따라 이리저리로 돌아간다.
겨울에는 오른쪽으로 쏠린다.
콧구멍이 가운데로 오는 것은 봄가을이다.
하지만 가운데로 오긴 해도
그때면 콧구멍이 위로 들려 들창코가 되고 만다.
입은 평상시에는 아주 과묵한 편이서
아주 시커멓게 입을 다물고 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녀석 앞의 식탁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떠드는 편인데
녀석은 한번도 우리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옮긴 적이 없다.
생활 깊숙히 윙크를 달고 사는 녀석이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녀석의 두 눈이 모두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가 따뜻한 물을 필요로 하거나
우리가 방안이 좀 춥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녀석은 그런 순간을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그 순간이 오면 녀석은 곧바로 두 눈을 반짝 뜬다.
두 눈을 뜬 녀석은
곧이어 처음으로 슬쩍 입을 벌린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항상 녀석의 이빨에 낀 꼬춧가루 하나가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온다.
으이구, 지저분하기는.
우리는 매번 그 고춧가루를 놀리긴 하지만
녀석은 전혀 우리의 놀림에 개의치 않는다.
조금있으면 녀석이 입이 더 벌어진다.
그 순간 양치질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좀전의 고춧가루는 어디로 가고
한쪽을 조금 더 연 녀석의 입이 있을 뿐이다.
녀석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하긴 거의 하루 종일 말한마디 없이
집안을 지키고 있으니
입이 근질거리만도 할 것이다.
녀석의 입이 드디어 반까지 열린다.
드디어 녀석이 무슨 말인가를 뱉기 일보 직전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입이 다 열리지는 않아
녀석의 말은 들리질 않는다.
입이 다 열리길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녀석의 입이 다 열렸다.
그러나 입을 다 연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슨 말이 아니라 환한 웃음이다.
녀석은 입이 약간 삐뚤어져 있긴 하지만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는
무슨 빨간 립스틱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 끝에선 항상 빨간 웃음을 한가득 입에 물고 만다.
우리는 물론 녀석의 그런 웃음이 반갑기 그지 없다.
녀석이 입안 가득 빨간 웃음을 베어물면
겨울철의 바깥 기온이 아무리 떨어져도
집안의 어디나 온기가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녀석은 정말 신비로운 녀석이다.
고춧가루낀 이빨을 씨익 드러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매번 끝에선 빨간 웃음을 입에 베어물며
녀석이 웃으면 온집안이 다 따뜻하다.
올겨울도 녀석이 간간히 웃으며
따뜻한 온기로 우리의 겨울을 덥혀주고 있다.
4 thoughts on “보일러의 웃음”
ㅎㅎ 잘 웃는데요 싱긋…
아 따뜻해지고…따뜻해진 방안의 공기가 웃게 해주었는지도요…ㅋ
암튼 동원님의 언어앞에서는 다 생명을 갖고 웃고 울고 사랑하고…ㅎㅎ
여름에는 거의 눈감고 지내는 녀석인데
역시 보일러는 겨울이 제 철인지
물만난듯 여러 표정을 얼굴에 담고 사네요. ㅋㅋ
혼자놀기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어디 껀진 몰라도 보일러 리모콘이 특이하게 생겼는데요.
거실에서 불꺼놓고 텔레비젼 보고 있으면
요 녀석의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와요.
깜깜한데 불만 선명하죠. 불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