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가끔 사는게 힘들 때면 이중섭이 그의 가난에 지쳐 그림에서 손을 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상상이 번져나가곤 한다. 그리하여 그가 두손 두발을 모두 걷어부치고 돈버는 일에 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그의 ‘황소’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가 담배갑의 은박지에 그린 아이들 그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지금의 세상에 중섭의 ‘황소’가 없고, 또 그가 담배갑의 은박지에 그린 아이들의 그림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갑갑해지기 시작한다.
중섭의 황소 그림이 허기진 배고픔에 아무런 안식도 주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도 아무런 해소의 실마리도 던져주지 못하는데, 왜, 나는 그의 그림이 없는 세상을 갑갑하게 느끼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단색의 독재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힘이 그가 가난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세상을 일본이란 하나의 색채로 덧칠하려고 했던 일제에 맞서 그 단색의 독재를 거부하고 맞서 싸워던 우리의 선조들은 중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가? 그들이 없어 오늘 우리가 일본이 떨어뜨린 풍요의 팥고물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우리를 잃어버린 그 풍요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하여 맞서 싸웠던 사람들에게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박정희도 세상을 그의 색으로 모두 덧칠하려고 한 단색의 독재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맞섰고, 그러다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들려오는 소식들에 의하면 아직도 세상에는 돈으로 덧칠되는 그 단색의 독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어찌보면 항상 항거는 소수의 몫이다. 가난이 우리들의 어깨에 얹는 무게는 쉽게 견딜 수가 없는 것이어서 한 때 항거의 길에 나섰던 사람들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 길을 가질 못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갔던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가끔 이 힘든 세상에서 숨을 쉬게 된다. 중섭의 그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때면 항상 가슴이 답답하듯이 세상의 온갖 독재에 맞섰던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할 때마다 갑자기 호흡의 곤란함이 확연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중섭의 그림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의 호사가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며 자유의 길을 간 진정한 삶의 전형으로 내 곁에 다가선다. 그의 그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느꼈던 나의 답답함은 그렇게 보면 저항의 자유를 찾아볼 수 없는 세상, 자유의 씨앗이 말라버린 세상에 대한 답답함이다. 풍요로와도 자유가 없는 세상은 답답한 것인가 보다.

4 thoughts on “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1. 열매란 늘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고 생겨나는 것이라면….풍요란 늘 자유와 평등의 기운을 받고 생겨나는 것이라면….자유가 없는 세상에 무엇이 풍요라 불리울 것인지 생각합니다…..

    1. 중섭의 그림 <황소>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나요. 그 그림이 마음을 가득채워주는 느낌이었죠. 그건 일종의 자유의 기운이기도 했구요. 돈을 벌려고 그리지 않은 그림이란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죠. 어찌보면 그림의 궁극을 추구한 작품이랄까. 아마도 그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곧 자유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2. 어디서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중섭 화백께서 그때가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했던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하더군요,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가난 때문에 억지로 아이와 아내를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그 비정한 한 아버지의 느낌을 그는 그림에다 녹였겠다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거 블로그 글 첨부터 뒤지는 불청객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은 보라고 올린 글들 감사히보도록 하겟습니다.

    특히 사진은 좀 유심히 보도록 하죠.(제가 사진을 무척 좋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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