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로 일어서는 나무 – 화가 이상열의 나무 그림

Photo by Kim Dong Won
「은행나무집」, 이상열 작

내가 나무는 물결이다라고 말을 하면 선뜻 호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물결로 일렁이는 나무를 실제로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지금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장면을 말함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나무를 말함이며, 그 나무가 물결이 된 장면을 말함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선 언제나 나무는 나무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로 건너오면 그런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특히 시각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이 그런 세계를 가장 확연하게 구축한다.
화가 이상열 선생님으로부터 전시회 소식을 알리는 엽서 두 장을 받았다. 앞뒤로 그림이 들어있다.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 주제인 나무들이 그 그림들의 화폭을 채우고 있었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나무와 동시에 물결이었다.
왜 그에게선 나무가 물결이 된 것일까.
사실 문학에선 이런 예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임후성의 시 「생의 한때」를 읽어보면 시인은 “물을 마시면/심장이 심하게” 뛸 때가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갈증이 심했을 때일 것이다. 그 순간을 가리켜 시인은 “물을 마신 심장은/숨의 군락/반가워서 날”뛴다고 말하며 그때의 모습을 가리켜 “뿌리가 물을 흠뻑 들이마시는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마 이러한 시각으로 한껏 물이 오른 나무를 바라 보았다면 그 나무는 물을 한잔 들이킨 끝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을 것이며 나무보다 그 거친 숨으로 더 큰 인상을 남길 가능성이 높다.
시인이 나무의 그런 모습을 텍스트로 옮겨가면 “숨의 군락”이 된다. 화가는 그 모습을 텍스트가 아니라 형상으로 옮겨가며 그러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나무와 동시에 물결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번에 받은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에서 물결이 보인 이유이다.
사실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던 대상을 넘어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에 그가 내놓았던 「개나리」란 그림에서 나는 개나리와 함께 작은 폭발을 본 경험이 있다. 그때의 개나리는 마치 화산처럼 터지듯 흘러나오는 어떤, 그러나 규모는 아주 작은 폭발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만난 2007년의 「개나리 II」는 세상을 노랗게 칠한 바다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 자연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도 자연의 풍경에 갇히지 않고 자연이 갖는 어떤 힘을 전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정적이고 고요한 자연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와닿는 자연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가 주제를 나무로 잡기 시작하면서 갖가지 나무를 그렸을 때 나는 그중 하나였던 「새봄 -벚꽃」에서 화폭을 가득채운 보라빛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보라빛은 내게 겨울을 넘긴 벚나무가 대지 깊숙한 곳에서 푸른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하얀 벚꽃을 피웠을 때 벚나무가 내뿜는 호흡의 빛깔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벚나무가 꽃을 피울 때 내뿜는 그 호흡의 빛깔이 보라색이란 것을. 하지만 호흡의 빛깔을 감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때 그 그림을 사흘 정도 계속 보고 또 보았던 기억이 있다.
2009년에는 푸른 사과나무의 그림에서 사과나무의 춤을 만났으며, 2010년에 그의 작품 「배꽃 향기」를 만났을 때는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나무를 일으켜세우는 정반대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같은 해에 이상열 선생님의 작품 「도원의 꿈」을 보았을 때는 나무를 화폭에 눕혀서 일으켜 세우려는 화가의 꿈이 읽혔다. 그리고 지난 해, 2011년에는 「사과나무 숲」을 만났다. 현실 속의 사과나무 숲에선 사과나무에 사과가 매달려 있겠지만 그의 「사과나무 숲」에서 나무는 사과가 묻혀있는 품이었다. 사과는 사과나무라는 품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올해 전시회를 알리는 엽서 속의 그림에선 나무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직접 그림을 보지 않고 도판만 본 상태라 실제로 보면 느낌이 실제 그림과도 똑깥이 겹쳐질지는 알 수가 없다. 원래 도판만 보고는 느낌이 잘 오질 않는데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은 선생님과의 인연이 오래되면서 이제는 도판만 보고도 어느 정도 느낌이 온다.
사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다른 화가에게서도 똑같이 접한 경우가 있다. 화가는 고흐였고, 작품은 「병원 정원의 오솔길」이었다. 보통 우리는 길이 흐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길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굳은 상태로 그 자리에 납짝 엎드려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길이 흐른다라는 말을 아주 일반적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길이 갖는 어떤 모종의 다른 속성을 언어 속에 담아낼 수 있게 되면서 얻어낸 매우 예술적인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길의 경우에도 그 흐름이 길마다 제각각이다. 가령 고속도로라면 그 길은 흐른다기 보다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오솔길이라면 졸졸 흐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고흐의 그림에서 본 오솔길은 정말 말그대로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림을 보러갈 때마다 형상의 너머로 넘어가도록 해주는 것이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어찌보면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은 나무가 나무로 굳어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것 같은데도 그 일상속에서 변화를 꿈꾸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면 그런 측면에서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 속 나무와 우리는 비슷한 운명을 사는 존재들이다.
이번에 이상열 선생님이 나무를 통하여 보여준 물결은 밀고 가면서 일어서려는 움직임이다. 엽서로 받아본 올해 이상열 선생님의 나무는 바로 그 움직임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가보질 못했다. 5월쯤 또 전시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가서 물결이 되어 일어서는 나무들의 움직임에 흠뻑 젖어볼 생각이다. 그 나무의 물결에 젖으면 그 주변의 집들도 물결이 되고 나도 물결이 될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사과나무집 II」, 이상열 작

**전시회는 다음의 일정으로 열렸으나 가보진 못했다
-전시회: 제30회 화랑미술제
-전시 기간: 2012년 2월 23일(목) – 26일(일)
-전시 장소: 서울 코엑스 3층 D홀

11 thoughts on “물결로 일어서는 나무 – 화가 이상열의 나무 그림

  1. 바쁘셔서 못오셨죠 ….. 엽서에 들어있는 이미지 만으로도
    이런 과한 해설을 해주시니 넘 기분이 좋네요 낼 연락드리겠습니다^^*

    1. 볼 때마다 조금씩조금씩 변화를 보여주시는게 놀라워요.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더니
      옛날 그림 생각하며 볼 수 있는 것도 저에겐 좋구요.
      얼굴뵙겠습니다. ^^

  2. 그림을 보니, 특히 사과나무집을 보니 물결 같다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네요.
    네.. 물결같고.. 바람같고..

    처음 접하는 분인데..잘 모르지만 참 좋습니다.
    잘 모르면서.. 죄송 합니다.

    1. 사과나무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사과나무의 열매가 붉은 꽃처럼 되어 있어 저는 꽃의 기억을 가진 열매인가 했었는데 다음 해에 지금과 같은 형상을 갖추면서 변모를 하더라구요.
      모르시긴요. 다만 제가 몇 번 더 그림을 많이 본 것 뿐이죠. 참주님은 살아온 삶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 보실 수 있게 된 분인 걸요. ^^

  3. 엽서 그림인데도 물감을 두텁게 칠한 입체감이 느껴지네요. 화가와 오래 교감하신
    따뜻한 감상평이 정겹게 들립니다. 저는 물결까진 모르겠고, 나뭇 사이로 부는듯한
    바람은 얼핏 느껴지는데요.^^

  4. 아… 이상열화가… 동원님을 통해서 알게 된 분이에요
    역시 이번 전시회의 작품도 마띠에르가 아주 강하네요
    나무의 결…물결… 동원님의 이야기에 공감해요
    얼마나 바쁘셨으면 이번에는 전시회에 못가셨군요…^^;;
    따뜻한 봄이 되면 실제 나무 물결을 보러 다니시겠지요?
    좋은 한 주간 시작 되시길요~~~*^_^*

    1. 마띠에르의 느낌이 약간 변하는 듯 싶어요. 처음에는 두껍게 칠한 물감의 마띠에르가 일어서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밀고 가면서 일어나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직접 봤으면 느낌이 더욱 확연했을 듯 한데 요즘 자주 전시회를 하시기 때문에 모두 다 가보진 못하고 있어요. 예술가들하고 인연을 맺으면 만나서 작품 얘기를 나누고 듣는 것이 큰 호사인 듯 싶어요.

    2. 나가려다가요^^ 동원님 얘기가 잼있어서요…
      동원님 대개의 작가들이 다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신이 나는대요^^
      동원님이야말로 아주 좋은 인연을 그들에게 …주시는 거에요^^ㅋㅋ
      그러네요 이 분의 작품이 조금씩 달라지겠군요…
      전시회도 자주 하시는듯 하구요…

    3. 이상열 선생님은 워낙 유머러스하셔서 만나면 거의 내내 웃다가 볼일을 다 보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만남이 즐거운 분이라는. 물론 간간히 그림 얘기를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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