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친구 하나가 제주의 강정에 내려가 있다.
한 사나흘 강정 마을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올라오려니 했는데
3월초에 내려간 그 친구가
4월이 시작되어 중순을 넘기고 있는 지금까지 여전히 강정에 있다.
떠날 때 “이제 막 시작한 중요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뒤로 하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마는 뱅기를 예약”한다고 했던 친구였다.
어떻게 여전히 강정이냐고 했더니 “있다보니 있게 되었다”고 했다.
집에서는 조금 오래 제주를 여행중인줄 안다.
나는 평생 비밀로 해주기로 약속했다.
4월 15일 일요일,
하남의 객산으로 진달래를 보러가려던 마음을 바꾼 것은
그녀가 오늘은 두물머리로 가자고 한 말에다
제주로 내려간 젊은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젊은 친구에게 두물머리의 사진 한장을 보내주고 싶었다.
함께 하지 못해도 그렇게 하면 연대감은 나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연대감이란 알게 모르게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간만에 찾은 두물머리에서 봄풍경과 함께 하게 된 연유였다.
나무에 물이 오르면서 새순이 돋는다.
새순은 나무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났음을 알리는 푸른 기지개이다.
나무 밑의 풀밭은 여전히 갈색이다.
가을쯤 풀밭엔 갈색빛의 잠이 깔린다.
풀밭의 잠은 지금도 여전하다.
풀밭이 잠이 많은 늦잠 꾸러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풀밭의 늦잠은
따뜻한 봄볕을 베고 누리는 매우 달콤한 잠일 것이다.
곧 나무가 그 잠을 흔들어 갈색 풀밭을 푸르게 깨울 것이다.
살펴보니 마른 풀밭에서도
푸른 잎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봄이야, 봄, 다들 일어나라고 하면서 소리를 치는 듯하다.
풀들은 끝이 모두 뾰족뾰족하다.
풀밭이 계속 잠을 청하기에는
귀가 무척이나 따가울 것이다.
지난 해 벼를 수확했던 논에도
푸른 풀이 잔디처럼 깔렸다.
남아있던 벼의 밑둥이
마치 푸른 풀밭을 줄지어 몰려다니는 듯하다.
논의 풀은 키가 작아 속삭이면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곧 논이 몸을 뒤척여 흙을 갈아엎고 벼농사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매일 오후 3시 생명 평화 미사를 드리는 곳에
버드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십자가 나무에도 푸르게 가지가 났다.
이곳 두물머리에선 십자가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도 생명을 품는다.
비닐 하우스엔 온갖 모종이 심어져 있다.
아마도 곧 노지로 가서 햇볕과 바람을 마음껏 호흡하며 자랄 것이다.
요즘은 씨앗을 곧바로 노지에 뿌리지 않고
온실에서 키워 세상으로 내보낸다.
아이들이 부모품에서 자라 세상으로 가듯이.
그러니 농부들에게 모종은 모두 자식들 같을 것이며,
농작물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흐뭇할 것이다.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다.
하얀 미소가 정결한 느낌의 꽃이다.
임인환 농부가 밭두렁의 잡풀들을 태운다.
봄날에 이렇게 불을 놓으면
땅에서 농사의 기운이 불꽃처럼 일어나곤 했을 것이다.
그 불꽃이 올해는 모든 개발의 탐욕을 태워버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가 봄마다 땅의 기운을 불꽃처럼 일으키며
농사꾼으로 계속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사실 두물머리로 가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가니까 김병인 농부님이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오늘은 선글라스로 한껏 멋도 내셨다.
자신을 잡아다 감옥에 쳐넣어도
자신은 감옥을 나오면
다시 이곳에 와서 씨를 뿌리겠다고 했던 분이다.
그의 웃음이 개발의 욕망에 맞서 이곳을 지키는 힘이다.
겨우내 비닐로 꽁꽁 싸두었던 두물머리의 비닐 하우스 성당이
허리춤의 비닐을 들어 올려 봄바람을 마음껏 맞아 들였다.
겨울 한철 안이 궁금했으나
그때마다 어렵게 빈틈을 기웃거려야 했던 바람이
드디어 때만난 듯 안으로 몰려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생명 평화 미사가 봉헌되었다.
789번째 미사이다.
이대로 계속되면 올해말 1,000회에 달하게 될 듯 싶다.
요즘의 주일 미사는 수원교구의 양기석 신부님이 집전하신다.
언제나 그렇듯 단순히 두물머리만을 위한 미사가 아니라
핵없는 세상을 위하여 강릉과 고리를 걱정하고
구럼비의 바위를 위하여 제주의 강정을 걱정하고 기도했다.
비닐하우스 성당에서 보면 강변의 나무 하나가 보이고
그 뒤로 남한강이 보이며 강건너의 산이 보인다.
이곳의 비닐하우스 성당이
나무와 강, 산의 자연을 업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곳의 자연을 짊어지고 이곳을 살리는 길을 가고 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떡과 커피가 함께 해주는 자리이다.
한때는 끝나고 나면
커피 보온병 서너 개가 모자랄 정도였으나 요즘은 한 병으로도 된다.
다시 떡과 커피가 모자랄 지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요한 얘기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 떡은 클라라란 분이 보내는 것인데
정말 맛있다.
강론 중에 양기석 신부님이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은 자신이 기회가 되는대로 공장이나 시장과 같은 곳을 찾기도 하는데
그곳을 찾아보면 사람들의 삶이 치열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부들이 일하는 풍경을 보면
일이 고되고 힘들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에선 평화롭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그런지 아냐고 물었다.
신부님은 그것은 농사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명을 살리고 키워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농사이다.
농사는 일을 하면서 평화의 그림을 그린다.
미사를 끝내고 나와 보니
농부들과 함께 하기 위해 찾아온 도시 사람들이
텃밭 가꾸기에 한창이다.
평화가 따로 없다.
농삿일은 농작물을 키우는 작업이 아니라
동시에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누군가가 밭의 한켠에 신발을 벗어놓았다.
흙에 맨발을 맡기고
흙이 어루만져 주는 그 감촉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중이리라.
이 땅의 농부들은 힘겹기 짝이 없다.
농사 하나만으로도 힘겨운데
농업을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도시 사람들이 두물머리를 찾아 그 싸움에 힘을 보태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힘을 보태주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공무원들이 와서 경작금지 팻말을 쳐놓고 갔다.
이런 것 하기 전에
청와대 앞에 가서 사찰 금지나 개발 금지 경고장을 발부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정작 금지해야할 것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것은 금지를 하는 세상이다.
트랙터가 지나가자 땅이 몸을 뒤챘다.
땅은 겨우내 땅에 납짝 엎드려 지낸다.
봄이 오면 트랙터가 땅의 굳은 몸을 일으켜 준다.
이랑을 돋우면 그 자리에 땅의 근육이 솟는다.
알고보면 농부들이 땅을 일으켜 봄을 부른다.
두물머리로 나서면 그것을 눈앞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
산이 산그림자를 강에 담그고
정신없이 들여다 보았나 보다.
그렇게 잘생겼냐?
이제 그만좀 봐라, 그만좀 봐.
지나던 바람이 놀리면서
강에 담긴 산그림자를 휘젖고 지나간다.
두물머리의 나무 한 그루가 뿌리가 뽑힌채 쓰러졌다.
우린 이제 그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무는 아직 땅속에 남겨둔 한줌의 뿌리로 생명을 길어올려
새싹을 틔웠다.
쓰러졌다고 죽지 않는다.
생명을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나무는 쓰러졌지만
아직 마른 몸을 서걱이는 갈대보다
쓰러진 나무가 더 먼저 푸른 잎을 일으킨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쓰러진 나무보다 더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냥 하루 두물머리에 가서
생명을 지키는 싸움에 동참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는 길에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면
풍경 좋은 늦은 오후가 손에 선물로 쥐어진다.
몸을 일으켜 제주의 강정으로 가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나무 하나가 논두렁을 끌어안고 넘어져 삶을 다했다.
나무는 그냥 버려져 있다.
그대로 두면 자연의 시간이 천천히 분해하여 땅으로 돌려보낸다.
논두렁 길을 가는 어느 누구도 길을 가로막았다고
나무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천천히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 걷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무얼 심었는가 모르겠다.
씨를 뿌린 농부는 아마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곧 비닐로 덮어높은 밭에서
뚫어놓은 구멍으로 싹들이 머리를 내밀고
우리와 함께 산들이 그리는 이 아련한 윤곽을 함께 감상하며 자랄 것이다.
뼈대만 남겨진 비닐 하우스는
마치 거대한 초식성 등뼈 동물 같다.
덩굴 식물이 그 뼈대를 타고 오르면
드디어 그 등뼈 동물의 몸에 살이 새로 돋고
그리하여 봄마다, 여름마다
그 동물이 다시 또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등뼈 동물의 속에서
부활의 꿈 속을 거닐었다.
두물머리 비닐 하우스에선 딸기가 한창이다.
여기저기서 붉게 익어가고 있다.
근처에만 가도 딸기향이 코끝에 진하다.
그러나 딸기들은 쫓겨날 처지이며 이미 많은 딸기들이 쫓겨났다.
농부들은 이 딸기를 지키고 싶어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딸기를 지켜주고 싶어한다.
딸기가 이곳에서 계속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딸기를 지켜주는 것이다.
시장에선 딸기밖에 구경을 못하지만
두물머리에선 딸기꽃도 볼 수 있다.
딸기 체험하러 왔다가
딸기가 아니라 꽃에 눈이 팔리기 일쑤이다.
그 꽃이 나를 지켜줘라고 하면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거절하는 인간들이 있다.
굳이 MB라거나 김문수라고 밝히고 싶지도 않다.
이제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다.
조팝나무 꽃을 보았다.
몽우리가 잡힌 가지에서 딱 하나가 피어있었다.
몽우리들이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나도 피울까 말까.
그 중의 하나가 앞을 나서 먼저 꽃을 피웠을 것이다.
사람들 하나하나는 조팝나무의 꽃처럼 작다.
그 작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큰 무리를 이룬다.
조팝나무 꽃도 작은 꽃들이 모여 거대한 무리를 짓는다.
땅을 일으켜 생명과 평화를 가꾸는 두물머리에
곧 조팝나무 꽃이 지천으로 덮일 것이다.
4 thoughts on “땅으로 일으켜 세우는 두물머리의 봄”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두머리는 그냥 그자체로 감동이지요. 제발 이대로 지켜지기를.. 두머리 식구들과 보도록 퍼가도 되겄지요?
그럼요. 퍼가셔도 되요. 여러 사람이 보고 힘이라도 얻으면 저야 보람있지요.
잔잔한 감동과 은근한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장편 서사시에서
올봄의 또 다른 아름다움과 힘, 자연스러움을 느낍니다.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게 좀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에 자꾸만 분개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