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너머에서 만나는 삶의 긍정 – 이상열의 그림 세계

이상열 초대전 도록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다. 아니 세상은 우리들 앞에 드러나 있는 듯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이는 것의 이면으로 넘어가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눈에 보이는 것의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예술은 바로 그 눈에 보이는 것의 너머로 넘어가보고 싶은 욕망의 하나일 것이다. 왜 우리는 보이는 것의 이면으로 넘어가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러면 삶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거나 확장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각 분야가 갖고 있는 특유의 방식으로 눈앞의 세상을 넘어가 삶을 재편하고 확장해준다. 문학의 경우 시를 통하여 그 예를 들어본다면 시는 텍스트를 통하여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간다.
가령 모든 나무의 밑에는 나무의 그림자가 놓인다. 우리의 눈에는 그림자이지만 시인 오규원의 눈에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가장 얇고/납작한 나무들”이다. 또 우리의 눈에는 길의 가운데까지 걸쳐있는 나무 그림자가 보이지만 시인 오규원의 눈에는 “두 그루 나무가 그림자를 길의 절반까지 풀”어놓고 있는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시는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 세상에 대한 유다른 표현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를 버리고 그 세계의 너머로 넘어가서 만나는 또다른 세계이다. 보이는 세계의 너머로 넘어가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림자에 묶여 살지만 그 세계를 넘어가면 “가장 얇고/납작한 나무들”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시가 텍스트의 힘을 빌려 우리 눈앞의 세상을 넘어가 보고자 한다면 그림은 색과 형상을 빌려 우리 앞의 세상을 넘어가고자 한다. 이상열은 화가이다. 당연히 그 또한 색과 형상을 통하여 우리 앞의 세상, 그 너머를 엿보려 한다.
시의 텍스트가 대상의 형상과 색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반면 그림은 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가지며, 그것이 그림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상은 화폭에 담길 때 있는 그대로 담기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물론 그 변화는 화가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모종의 변화를 통하여 화가는 대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대상의 너머로 넘어간다. 화가 이상열의 경우 표면적으로 보면 그 변화는 두텁게 칠한 물감을 통하여 구축하는 그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만의 이러한 특징을 통하여 그는 어떻게 우리 앞의 세상을 그의 그림 속에서 세상 너머의 세상으로 펼쳐보이는 것일까.
우선 화가 이상열의 그림 세계로 가기 전에 우리들 눈앞의 세상으로 한번 가보자. 가령 우리가 가을녘에 경북 상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거닐고 있다고 해보자. 상주는 감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가을에 그곳을 찾았다면 이제 잎을 모두 털어낸 뒤 붉게 익은 감을 가지 끝에 매달고 있는 감나무를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감나무는 주로 인가 근처에 많다. 따라서 감나무의 빈가지 사이로 가까이 집이 한채 보일 수 있다. 집의 주변은 앞과 뒤가 온통 노란 단풍이다. 날은 맑아서 하늘은 매우 푸르다.
붉게 익은 감과 노란 단풍, 그 단풍에 둘러쌓인 집 한채, 그리고 푸른 하늘이 서로 맞물려 엮어내는 이 풍경의 조합이 화폭에 담겼다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 그림의 계절을 가을로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말한 이 풍경은 화가 이상열의 그림 「감나무」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풍경이다. 그는 어느 해 가을 경북 상주 지역의 한 마을에서 그러한 풍경을 마주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 「감나무」는 바로 그때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그 그림 앞에서 일차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주 농도 짙은 가을이다.
그러나 이상열의 그림 「감나무」가 가을을 보여주는데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그림 「감나무」에서 노란 단풍은 단풍이라기보다 노란 물결이다. 때문에 그의 그림 속 세상은 노란 단풍에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란 색채로 물들어 있다. 심지어 집까지도 노랗게 물들어 있다. 실제로 우리는 단풍든 풍경을 접하면 세상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들어 있는 것은 노란 단풍에 국한된다. 노란 단풍으로 인하여 세상이 노란 빛으로 물들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사실은 세상의 실제이기 보다 우리들의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상열의 그림 「감나무」는 노란 단풍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느낌을 그 자리에 함께 겹친다. 즉 그의 그림 속에서 노란 단풍은 풍경이기도 하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받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엔 풍경과 우리의 느낌이 함께 담겨있다. 실제 풍경 앞에선 풍경과 그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갈라서 있지만 그림 속에선 풍경과 우리의 느낌이 동시에 자리할 수 있다. 그림만이 구현할 수 있는 세상이다.
가을 서정이라 제목을 붙여도 좋을 이 그림이 그러나 가을 풍경과 가을의 느낌을 동시에 전하는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화가 이상열만의 세계를 가장 특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곳에서 찾아진다. 그 부분은 바로 그림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감나무이다. 그의 그림 「감나무」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노랗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가을이 전체적으로 그림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림의 중심은 감나무란 것이다.
감나무는 화폭의 한쪽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가지를 가운데로 뻗어 붉게 익은 감을 화폭에 고르게 나누면서 그림의 균형을 잡는다. 그 감나무의 열매를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 마치 감나무가 그 열매를 맺기 위하여 달려온 한해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붉은 응결체처럼 보인다. 그리고 가을의 모든 색채, 그러니까 푸른 하늘이나 노란 단풍의 색채도 그 붉은 감이 그 결실의 색채로 풀어놓음으로서 그와 맞물려 비로소 가을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화가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감나무는 한해의 세월을 붉은 감에 응결시켜 가을의 빛깔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세상에 풀어놓으면서 그 열매를 중심으로 가을을 불러모으는 열매이다.
감나무에 대한 느낌이 이에 이르면 이제 감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곧 우리들의 모습이 되버린다. 사람들은 종종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때로 그 꿈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다. 그냥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세끼를 걱정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꿈이 되기도 한다. 감나무의 감도 특별한 열매는 아니다. 그러나 이상열의 그림 속에선 그 감나무의 붉은 열매가 가을의 중심을 잡는다. 살다보면 삶은 평범해지고 꿈도 삭제된다. 그러나 이상열의 그림 속 감나무는 열심히 살았다면 거두어들인 결실이 어떻든 그것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아울러 그것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그 궁극에선 나무를 너머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령 「복사꽃 피는 계절」에선 복사꽃의 너머로 한창 꿈에 부풀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며, 「배꽃 향기」에선 겨울의 시련을 딛고 이제 또다른 출발점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사과나무」에선, 그가 그 그림의 소재를 충북 충주의 어느 사거리를 지나다 거리에 선 사과나무에서 얻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들이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어떤 꿈의 원형질을 보는 듯하다. 물론 「감나무」의 경우에도 그 점은 예외가 아니다. 손에 쥔 가을을 세상으로 풀어놓고 있는 느낌의 그 감나무는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이룬 결실 하나하나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 세상의 균형과 중심을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이룬다고 말한다.
화가 이상열은 한 편의 그림 속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다시 또 그의 「감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 그 앞에 서면 높고 푸른 하늘과 노란 단풍, 단풍에 묻힌 집, 붉게 물든 감나무를 우리에게 내놓은 듯 보이지만 우리는 그 풍경들의 조합은 자연스럽게 가을이란 계절로 수렴이 되며, 그 가을은 다시 세상을 모두 노랗게 물들일 듯한 가을 풍경에 대한 우리들의 느낌이 된다. 그리고 그 가을의 느낌은 한해를 달려온 끝에 열매를 맺고 그 붉은 결정의 색채를 가을 속으로 서서히 풀어놓고 있는 듯한 감나무로 이동이 되고, 감나무는 곧 하루하루의 일상을 견뎌 내면서 한해를 살아온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감나무를 바라보는 우리의 여정은 풍경에서 시작했으나 결국은 우리 자신을 마주하는 걸음으로 마무리된다.
화가 이상열은 그림의 소재로 보면 나무의 화가라는 별칭이 아주 자연스럽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사과나무를 만나고, 감나무를 만나며, 또 복숭아나무를 만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나무는 나무로 머물지 않는다. 그 나무들은 때로 우리들을 꿈에 부풀던 시기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결실을 손에 쥔 뒤 그것을 세상과 나눌 때 더욱 기쁘고 즐겁던 우리들의 모습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열의 그림 속엔 내가 나를 만나는 여정이 펼쳐져 있으며, 우리는 그 나무들의 너머에서 우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우리들에게 화가 이상열은 이 세상의 모든 삶이 사실은 모두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그 목소리를 나무에 담아 우리들에게 건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가끔 삶이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화가 이상열의 그림 앞에서 그가 건네는 삶의 긍정으로 힘을 내시라.
(2012년 이상열 초대전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 – 풍경 이야기』 도록 해설)

지상 전시


복사꽃피는 계절
Oil On Canvas
72.7*60.6cm
2011

이상열의 복사꽃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다. 아니 불처럼 타오르는 듯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들이 한 때 꿈을 가졌을 때, 그 꿈의 형상과 색을 그림으로 옮겼다면 이와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사꽃이 피는 계절은 단순히 봄이 아니라 복사꽃이 꿈을 잃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외치는 계절이다. 꿈만으로도 삶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며.


배꽃향기
Oil On Canvas
45.5*38.0cm
2009

배꽃은 눈처럼 보인다. 배나무가 이겨낸 겨울의 기억이 그 흰꽃의 한켠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때 배나무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그 시련의 계절은 더 이상 아픈 기억이 아니다. 시련을 딛고 피운 꽃은 더 큰 기쁨이다. 배꽃의 향기에 실려 그 기쁨이 일렁이고 있다.


강이 보이는 매화나무
Oil On Canvas
72.7*60.6cm
2010

강은 생명의 모태같은 것이다. 나무에겐 더더욱 그렇다. 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한껏 꽃을 피워올린 매화나무는 삶이 힘겹다면 매화가 필 때쯤 강변으로 한번 나가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매화나무에는 마치 날개가 모두 흰빛인 새들이 하늘을 날기 전에 목을 축이기 위하여 강을 찾았다가 그 가지에 내려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목을 축인 새들은 곧 하늘로 비상할 것이다. 강변이 보이는 곳에서 목을 축이고 마음의 준비를 할 때 매화꽃이 핀다.

사과나무
Oil On Canvas
162.0*112.0cm
2011

화가 이상열은 그림 속의 사과나무를 사실은 충북 충주의 어느 사거리를 지나다 보았다고 했다. 보는 순간 사과나무가 마치 날아와 박히듯이 그의 눈속에 새겨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길거리는 지워버리고 그 길에서 만난 사과나무만을 화폭에 담았다. 그것은 삶의 한가운데 서 있지만 사람들이 잃지 않고 있는 꿈의 원형질 같은 것이었다.

감나무
Oil On Canvas
91.0*72.7cm
2011

감나무의 감은 모양은 붉게 움켜쥔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가을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가을을 세상으로 풀어놓는다. 감이 익어갈 때쯤 세상이 가을로 물드는 것도 감이 가을을 그 열매 속으로 움켜쥐지 않고 세상으로 풀어놓기 때문이다. 감이 그렇게 가을을 풀어놓을 때 세상이 노랗게 단풍이 들고 하늘 또한 높고 푸르러진다.


은행나무집
Oil On Canvas
116.7*72.7cm
2011

은행나무가 서 있으면 그 집은 은행나무집이 된다. 단순히 이름만 은행나무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는 그 집마저 은행나무의 노란 빛으로 물든다.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이 세상에 우뚝서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사실은 세상을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초대전은 다음의 일정으로 열렸다
-전시회: 이상열 초대전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 – 풍경 이야기』
-전시 기간: 2012년 4월 19일(목) – 5월 10일(목)
-전시 장소: 서울 을지로5가 케레스타 백화점 2층 갤러리 케레스타

2 thoughts on “나무 너머에서 만나는 삶의 긍정 – 이상열의 그림 세계

  1. 아름다운 그림이 심미안을 지닌 시인을 만나 지상으로나마 충만한 감동을 선사해
    주는군요. 전시장에서 작품을 마주 대했던 관람객들은 무척 행복했을 것 같네요.
    다음엔 끝나기 전에 알려주세요.^^

    1. 저도 못갔어요. 최근에 도록을 받고 이제야 올렸습니다. 요즘 완전히 전국을 누비시는 초인기 화가가 되셨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1년 내내 전시회를 하시는 것 같아요. 서울 전시는 가을쯤 가야 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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