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찍을 거리가 다르다.
봄에는 주로 꽃을 쫓아 다닌다.
여름에는 비오는 풍경이 좋다.
겨울에는 눈소식을 따라 다니게 된다.
가을에는 단풍이 가장 찍을 만하다.
하지만 철마다 꽃과 비, 눈, 그리고 단풍을
제때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는 봄에 가장 시간을 잘 맞추었던 것 같다.
일이 꽃피는 시기를 잘 비켜가 주었다.
하지만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는
일을 붙잡고 지나가는 가을을 아쉬움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가을을 모두 놓친 것은 아니다.
남한산성으로 하루 나들이를 했고
동네와 서울 도심을 돌아다니며 간간히 가을을 마주했다.
그런대로 괜찮은 가을이었다.
나무의 가지 사이에 해가 걸렸다.
눈이 부시다.
그러나 눈이 부신 것은 햇볕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는 햇볕보다 단풍이 더 눈이 부셨다.
성밖에 가을 단풍의 대군이 몰려와 있었다.
성을 점령하려고 몰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성을 가운데 두고 어떤 대치도 없었다.
뜨겁게 진한 빛깔로 몰려올수록 볼만한 가을 선물이 되었다.
성곽이 몸을 틀며 지형을 따라 오르내리고를 반복하고
그 길의 걸음을 가을 단풍이 붙잡는다.
성곽의 걸음이 갈팡질팡 갈피를 못잡고 흘러가는 것은
사실은 지형 때문이 아니라
가을 단풍에 눈을 팔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는 붉게 서쪽으로 지고
가을은 붉거나 노란 단풍 속으로 진다.
단풍은 붉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노란 손에 붉은 물을 들이는 것이 단풍인가 보다.
때로 단풍은 낮게 임하기도 한다.
보통 낮은 곳에 성스러운 사랑이 있을 때가 많다.
그러니 성스러운 사랑을 꿈꾼 단풍일지도 모른다.
단풍이 고운 짧은 길을
그냥 하루 종일 왔다 갔다 걷기만 해도 좋을 듯 싶었다.
갈 때면 햇볕이 눈부시게 단풍의 색을 몸 앞으로 밀어
앞쪽을 물들여주고
올 때는 다시 등 뒤를 어루만져
앞뒤를 모두 가을색으로 물들여 줄 것 같은 가을 숲이었다.
사람들은 노란 은행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었다.
노란빛에 물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노란 은행잎은 여전히 가지에 매달려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마음을 노랗게 물들이며
끊임없이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라도 들이받을 듯한
그 높은 건물들의 위용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며
내 눈을 가득 채운 것은 한 그루의 작고 노란 은행나무였다.
가을 구경 하나 못하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돌듯 지하철타고 출퇴근하는
불쌍한 신세라고 생각지 마시라.
가을은 지하철의 환기구를 타고
지하철 속의 공기속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니 가을의 마지막 향취를 숨쉬며 이 가을을 마감들 하시라.
혹시 손이라도 맞잡으면 뜨거울까.
은행잎은 가을을 노랗게 칠한다.
그런데 은행잎이 가을을 노랗게 칠할 때는
노란색을 바로 칠하기도 하고 뒤집어서 칠하기도 한다.
바로 칠하면 샛노란데 뒤집어서 칠하면 좀 바랜 듯한 노란 빛이 나온다.
뒤집어서 칠하는 이유는 바람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바람은 절대로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직도 여름이 가질 않고 풀밭 위에서 푸르게 뛰어놀고 있다.
마치 저녁 때가 되었으니 밥먹으로 집으로 가라는 듯
단풍이 푸른 풀밭 위에서 붉은 가을을 흔들고 있었다.
야, 같이가. 먼저가지 말고.
가을은 이미 어디에나 와 있어.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은 것 뿐이야.
성급하게 굴지 말고 같이 가을을 맞자.
잎을 떨군 담쟁이의 줄기에 노란 가을이 배달되었다.
담쟁이는 노란 가을을 주문한 적이 없다고 했으나
바람 택배의 기사는 주소가 여기라며 그냥 건네주고 가버렸다.
바람 택배는 가끔 믿을 수가 없다.
종종 마음 내키는 대로 가을을 배달한다.
가지 사이를 모두 노란 빛으로 채우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저녁해가
가운데에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다.
곧 남은 단풍도 자리를 비우고
푸른 하늘을 가지 사이로 부를 것이다.
손을 벌린 단풍은 하늘을 부르는 손짓인지도 모른다.
하늘은 우리들이 이땅에서 하는 짓이 괘씸하여 낮은 곳을 멀리하지만
단풍의 고운 손이 흔들면 마음이 흔들려
매년 가을끝엔 가지 사이를 채워주며 이 땅으로 다시 내려온다.
4 thoughts on “올해의 가을 단풍”
남한산성 여러번 갔지만 그중 최고의 날은 올 봄 세가정이 함께 했던 산행이었던거 같아요. 털보님 따라 요기조기 숲길도 헤쳐다니며 지뢰밭길도 가고 성벽을 따라 오르고 내리면서 방금 지나온 숲도 성벽 반대편에서 감상하고 말이죠.
저 성벽을 사이로 나누어진 산성단풍숲을 보니 그 때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보니 두 번 갔었군요.
내년엔 가을에 그 코스를 한 번 더 밟아보고 싶네요.
그때 산행기 다시 읽어봤습니다. 사실은 원래 생각해 두었던 길을 잃어버려 땀이 좀 났더랬습니다. 같이 간 분들이 그런 것에 괘념치 않는 분들이라 괜찮았지 다른 모임 같았으면 욕먹을 뻔 했죠. 겨울에 눈오면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을 한번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한번 알아봐야 겠어요.
올가을엔 단풍 구경 더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각양각색 사진에 시어 같은 나레이션을 곁들인 단풍 다큐를 만든 김 감독님 덕분에
즐거워지는 아침입니다.
바깥에 나간 것은 며칠 안되었지만 집중적으로 단풍을 구경한 듯 싶어요.
내년에는 어디 풍광 좋은 산에 하루 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