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시 「그늘」의 첫구절이다.
길모퉁이에서 아니면 들판의 너른 이마 위에서 내 허파 위에서 초록 깻잎 위에서 아니면 밤새 수그리고 잠든 책 말이 없었을, 숨은 기다림 위에서 너를 한 번 이상 안았던 듯하다 나는 많은 색을 지나오느라 온몸이 울긋불긋해
그러니까 시인은 ‘너’라고 지칭이 되는 누군가를 안았던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 안았다고 확정하질 않고 ‘안았던 듯하다’고 그 기억을 흐릿하게 뭉개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문제는 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누군가를 안았다고 해보자.
박연준은 그를 안았던 장소를 나열한다. 그를 안았던 곳은 처음에는 ‘길모퉁이’와 너른 이마처럼 펼쳐져 있던 어느 곳의 ‘들판’이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내 허파 위에서”에서 그를 안았던 적도 있었다. 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그래도 이 얘기는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가 내 존재의 숨결 같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산소 같은 여자라는 광고 문구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가 빠를 수도 있다), 안으면 허파가 있는 가슴 부분이 닿게 되니 말 그대로 허파 위에서 안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를 안는데 그치지 않고 그를 안았을 때 그를 숨쉬는 듯 했다는 느낌 때문에 굳이 허파 위에서 그를 안았다는 기억으로 그가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초록 깻잎 위에서” 안았다는 얘기는 그보다 좀더 어렵다. 나는 상상했다. 혹시 삽겹살 집에 가서 깻잎에 고기 한점 싸주며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좀더 피부에 와닿게 아주 현실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어느 날 삼겹살 집에서 초록 깻잎에 고기 한점 싸서 너에게 먹여주며 히히덕거릴 때 마치 너를 안은 기분이었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내 짐작이 맞다면 시인은 왜 삼겹살 얘기는 쏙 빼놓고 ‘초록 깻잎’만 내세운 것일까. 의문을 제기하기야 했지만 그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삼겹살을 싸서 먹여준 것이 아니라 깻잎 위에서 그를 만나고 안은 것이었으니.
시인은 또 이번에는 그를 기다리며 책을 읽다가 수그린 자세로 잠에 들었다가 그를 만나고 안은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기다린 것은 시인이었을 터인데 시 속에선 책이 수그리고 잠에 들었다가 그를 만난다. 말하자면 시인의 기다림이 책으로 전이가 된다. 시인의 기다림은 잠에 든다고 끊어지는 기다림이 아니다. 시인이 잠에 들면 그 기다림을 시인이 엎드려있는 책이 이어받는다. 기다림의 마음을 책도 알아차린다.
하지만 ‘숨은 기다림’이란 말은 시 속의 만남이 실제 만남이었는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혹시 실제로는 만나질 못하고 짝사랑하던 사람을 그냥 그가 보이는 먼발치에서 보기만 하고 지나친 것은 아니었을까.
그를 안았던 장소를 이런 식으로 풀어가면 시에 대한 해명은 되지만 마지막 구절, 즉 “나는 많은 색을 지나오느라 온몸이 울긋불긋해”라는 말은 잘 해명이 되질 않는다. 그것은 이 구절을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구절의 해명을 위해선 다음의 구절로 넘어가야 한다.
물감들은 알루미늄 틀 안에 갇혀 어떤 형상으로 쏟아지길 기다릴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발사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지 기름 냄새를 피우며, 물감들은 물감이면서도 아직 색을 입지 못한 무형의 몸,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박연준에게 만나서 서로를 포옹하는 구체적인 행위와 기다림은 그림과 물감에 비견된다. 만나고 포옹하는 행위는 그림이다. 그것에 대한 기다림은 아직 그림이 되지 못한 물감의 상태이다. 시인은 정말 만난 것일까. 혹시 만남은 없고 기다림으로 불발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으로 그려지지 못하고 물감만 잔뜩 가진 불행이 그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나는 많은 색을 지나오느라 온몸이 울긋불긋해”는 물감을 기다림에 비유한 이 구절들에 기대면 그 뜻이 확연해진다. 그것은 나는 기다림에 물들 정도로 오래 기다려왔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기다리는 것들은 초조한 꿈길을 걷는다 아니 꿈속에서조차 기다리느라 걷지 못한다 아픈 시간들은 다 앓고 난 후 어디에 폐기되는 걸까? 어디까지가 어둠인지 알 수도 없게 수상한 그늘
기다림이 길어지면 꿈속에서도 초조해진다. 기다림은 사람을 한 자리에 주저 앉힌다. 기다림이란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을 마냥, 하염없이,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대책없이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아프다. 박연준에게 그 기다림은 양지가 아니라 그늘이다. 즉 그는 그늘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곧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도 어둠에 방불하는 그늘이며, 때문에 어디까지가 어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깊게 삶을 덮고 있다. 정말 그는 누군가를 만난 것일까. 혹 만나지도 못하고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너무 빨리 죽어서 환멸을 느낄 새도 없이 멀리
그저 멀리
환멸은 만남에서 온다. 만나고 싸우고 실망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환멸을 맛본다. 기다림의 그늘이 넓을 때는 환멸을 느낄 기회조차 없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다니.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비가 내렸고
어디 멀리서 한 사내가 짐승 소리를 내며 나를 잊고 있다고,
캄캄하게 넓어지는 그늘
─박연준, 「그늘」 이상 전문
박연준은 비가 내렸다고 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따로 그늘이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런 날 “캄캄하게 넓어지는 그늘”을 본다. 그늘이 곧 기다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비는 그 기다림을 한층 강화해주는 기후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날씨가 흐릴수록 기다림의 농도도 진해진다. 시인은 “어디 멀리서 한 사내가 짐승 소리를 내며 나를 잊고 있다고” 했다. ‘짐승 소리’에서 나는 육체적 사랑을 상상했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그 사랑은 이 시속에선 그늘이 되어버린 기다림의 사랑과 대변되어 양지의 사랑이 된다. 몸이 만나 서로를 안을 때 삶에 볕이 든다. 그 몸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 삶에 그늘이 진다.
나는 양지 속에서 20여년을 살았다. 같은 집에서 그녀와 살게 된 이후로 20여년이 양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으로 마중나가 길모퉁이에서도 그녀를 만났고, 집안에서 매일만나고 있는데도 그 만남을 또 들판만큼이나 넓은 바닷가로 끌고가 다시 또 그녀를 만난 적도 있다. 우리가 만나고 안았던 그 시간들이 양지의 시간이었을까. 시인은 내게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다 읽은 뒤끝에서 나는 시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양지가 오래 지속되면 그 양지가 그늘이 되고 그늘이 양지가 된다는 사실을. 그늘과 양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그 둘을 양지와 그늘로 번갈아가며 뒤집는 것이 바로 삶이란 것을. 박연준은 아직 그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 있다.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는다면 그건 언제 죽어도 “너무 빨리 죽”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구절은 “물감들은 알루미늄 틀 안에 갇혀 어떤 형상으로 쏟아지길 기다릴까?”라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 말은 알루미늄 튜브 안에 들어있는 물감으로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라는 말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말 속에 말들이 갇혀 있다. 시인은 말속에 갇힌 말들을 꺼내 세상으로 자유롭게 방면한다. 시는 갇혀 있는 말들의 탈출구이자 해방의 통로이다.
아직 시인이 그의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 있긴 했지만 그의 말들은 갇혀있질 않았다. 나는 말들이 풀려난 박연준의 세상이 좋아 오랫동안 그늘에 머물고 싶었다.
(2013년 3월 20일)
**인용한 박연준의 시는 다음의 시집에 실려있다.
박연준 시집,『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2012
2 thoughts on “그늘이 된 기다림 – 박연준의 시 「그늘」”
아, 이글은 시인분의 시집에 나올 평론인거 같다는 느낌..맞군요?
찬찬히 읽어 보도록 하겟습니다^^
시집에 나오는 글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쓴 거예요. 좋은 시를 보면 딱 한편만 갖고 이렇게 쓰곤 합니다. 오해 없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