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아의 피아노 독주회를 보면서
자리를 잘 잡은 덕택에 손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펴볼 수 있었다.
텍스트에 대한 독해력만 발달해 있고
음에 대한 독해력이 전혀 없는 내게
손의 움직임을 보면서 들을 수 있다는 시각적 혜택은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두번째 곡이었던 리게티의 곡중
에튜드 5번 무지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소리없이 치는 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제 막 잠에 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도닥이며 손을 거두듯
피아니스트의 손은 건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것은 소리없이 치는 음이었다.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음은 어찌나 잠이 잘 들었는지
피아니스트가 일어나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도
쌔근쌔근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함인아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슈베르트의 곡을 마지막 곡으로 들을 때
음도 원근감을 갖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작거나 큰 경우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피아노와의 물리적 거리는 항상 똑같은데
마치 음이 뒤로 물러나서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 경우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림에서 작거나 큰 크기만으로
원근감이 표현되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다.
어느 순간 음이 뒤로 물러나 거리감을 벌렸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처음 경험한 음의 원근감이었다.
•시인 김경주는 그의 시 「비정성시(非情聖市)」에서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고 했다.
함인아의 피아노 독주회를 보면서 문득 그 싯구절이 떠올랐고,
음악이란 음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음악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몸은 손으로 만져보거나 눈으로 봐야 확연하게 잡히는데
음악의 경우엔 그 몸을 귀로 들어야 한다.
귀에도 눈을 가진 사람만이 그 몸을 보고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어려운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시인 오규원은 그의 시 「손-김현에게」에서
‘손’을 가리켜 그것을 ‘언어이리라’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언어는 곧 손이다.
때문에 시인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만진다.
시인의 언어는 대상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대상을 만질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다.
함인아의 피아노 독주회를 보면서
피아니스트는 음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몸을 만질 수 있는
놀라운 손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눌러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섬세한 손으로 음으로 이루어진 몸을 만진다.
우리는 피아니스트가 음의 몸을 만질 때
그 몸을 귀로 듣는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할 때
우리는 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의 몸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귀로 몸을 들으면서 음의 몸을 만져보고 싶었다.
•시인 박연준은 그의 시 「보라색 자물쇠」에서
“이를테면 피아노 건반의 검고 흰 막대들이/
어느 것이 ‘도’이고 어느 것이 ‘솔’인지/
자기들 속내를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듯/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인은 그런 상황이 되자
‘아침’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연주”가 되었다고 했다.
함인아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도와 솔이 모두 자기들 속내를 밝혔다.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설득이 되면
모든 음들은 자기네 속내를 밝힌다.
하지만 음들이 밝힌 속내를 텍스트로 읽어내긴 어려웠다.
음들의 속내는 피아니스트가 그 속내를 밝혀주어도 읽기가 어렵다.
•몇 가지 궁금한 점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채윤이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채윤이는 중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내가 아는 미래의 피아니스트이다.
•연주회는 2013년 3월 20일 수요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