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떠한 해석의 틀에 기대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달라지곤 한다. 예를 들어 속죄양은 사전의 뜻풀이를 쫓아가면 제의에 사용되는 동물을 뜻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인 셈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학자 르네 지라르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사람들의 집단적 증오가 집중된 죄없는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오이디푸스에 대한 그간의 시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힌다. 그 이야기의 줄기를 이루는 큰 뼈대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얼개 속에서 바라보면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뒤흔든 인물이 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징벌은 당연해진다. 프로이드에 기대어 그 이야기를 살부 욕망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용어로 설명해 가는 것 또한 그러한 표면적 이야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라르의 시각에 의존하면 오이디푸스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지라르는 그가 일종의 속죄양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지라르적 의미에서의 속죄양이다. 다시 말하여 페스트라는 테베를 휩쓴 사회적 위기와 그것으로 인한 사람들의 분노가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그리하여 바로 오이디푸스가 속죄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시각에 서게 되면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위기의 원인 제공자라기보다 오히려 무고한 희생자로 뒤바뀐다.
지라르의 견해가 나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이 희생자의 편에 서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신화 속에선 오이디푸스의 추방이 정당화되지만 그것은 박해자의 입장에서 표면적 서술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나 설득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집단 살인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폭력적 사회 구조가 그 이야기 이면에 은폐되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러한 사회 구조가 부당해지며,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추방 또한 정당성을 잃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라르는 신화의 표면 구조가 아니라 그 이면으로 눈을 돌려 은폐되어 있는 집단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희생자의 무고함을 변론하고 있는 셈이다.
신화의 시대가 막을 내린지 이미 오래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희생자가 없는지를 염려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을 테러의 응징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할 때 바로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선다. 그것은 박해자의 논리이다. 하지만 지라르의 시각을 빌려 그 테러의 응징을 바라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하나의 속죄양으로 삼아 미국인 전체의 분노를 해소시키고 사회적 혼란을 가라앉히려는 불순하고 정치적인 의도의 은폐로 보인다. 그들이 우리의 반쪽인 북한까지를 악의 축으로 언급함으로써 우리는 더더욱 그런 희생의 당사자 입장에서 박해자의 논리 이면으로 눈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구촌 동쪽의 작은 나라에선 반미라는 구호가 한 나라에 대한 반대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은폐된 희생자의 아픔에 눈길을 돌리는 또 다른 정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시립대 신문, 2002년 2월 28일자

2 thoughts on “희생자의 편에 서서

  1.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대기업의 제한 품목이 정해졌을때….뙤약볕을 맞아가며 고개숙여 한 단의 파를 바라보는 노점상의 눈물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실개천을 이루는 그들의 핏줄을 외면하면 냇물이나 강의 건강도 나빠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1. 언어학 책을 들추다 보면 모든 말은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나와요. 가령 아버지라는 말은 어머니가 아니다라는 부정을 내포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현상은 부정을 내포하는 듯 싶어요. 성장한 대기업은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일 수 있는데 우린 그런 부정적 측면에는 눈길을 잘 안주는 듯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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