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오염? 아니, 언어의 자유!

말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고, 말이 있어 그 고백 앞에서 가슴 떨리는 젊은 날의 한 순간을 가질 수 있다. 말이 있어 그 마음의 문양을 적어낼 수 있고, 말이 있어 그렇게 새겨진 글자로부터 마음의 색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말은 그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 구실을 해주고 있다. 말 이전에 우리는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갇혀있으나 말을 통하여 타인에게 가며, 타인은 나에게로 온다. 그렇게 보자면 말은 온전하게 기능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해방의 통로가 된다.
하지만 시선을 달리해 보면 말의 의사 소통 기능은 일종의 틀을 전제로 한다. 그 틀 속에선 사과라는 말이 사과를 뜻하고, 비행기는 비행기를 뜻하며, 그러한 일정한 의미의 단어들을 일정한 구조 속에 일정한 순서대로 조합해야 비로소 다른 이에게 소통이 되는 의미있는 말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의사 소통은 그 틀의 제한을 벗어나지 않아야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의 틀이라는 구속을 받아들이면서 그 댓가로 의사 소통의 자유를 누리는 셈이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는 말로부터 자유롭다기보다 말에 갇혀 있다.
그런데 요즘 이 언어의 틀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의사 소통의 지반을 뒤흔들고 있는 그 위험스런 행동의 주인공은 젊은 세대들이며, 그들의 무기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그들이 언어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는 현장은 채팅이나 이메일을 통해서 이제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간혹 그들도 서로 상대방의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몰라 물어보야할 정도로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방식의 대화가 많다.
기성 세대의 눈에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염려스럽기 그지 없으며, 심지어 언어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지탄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채팅이나 이메일 공간에서 향유하고 있는 그 언어의 일탈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손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그들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지 않고 ‘안녕하셈’으로 끝을 줄여버린다. 물론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왠지 겸연쩍고 경박스러운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얘기는 결국 내가 언어의 틀에 굳게 묶여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나는 ‘안녕하세요’라는, 정상적이라는 언어의 꼬리표가 붙은 그 언어의 틀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그 틀 속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정상 영역의 바깥으로 벗어난 언어들을 자유롭게 호흡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생각을 밀고 나가면 젊은 세대의 그 경박스러움은 오히려 언어의 틀을 벗어던지는 해방의 몸짓으로 얼마든지 옹호될 수 있다.
억압의 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나는 그러한 통신 상의 일탈된 언어들을 오염이나 공해로 보기보다 언어의 자유로 이해해주고 싶다. 혹시, 아는가. 그렇게 언어의 자유를 누린 경험의 주인공들이 그 가벼운 일탈의 뒤끝에서 깊이를 고민하며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게 될지. 그러니 그들이 누리는 언어의 자유를 그냥 버려 두시라.
–서울 시립대 신문, 2002년 3월 28일자

2 thoughts on “언어의 오염? 아니, 언어의 자유!

  1. 지금 우리가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까닭은… 자유가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 준 고마움 때문이라 말합니다…..하지만 자유가 책임을 떠난다면 일말의 방종으로 그치고 만다는 사실은 잊지말아야 할 것 입니다…

    1. 쉽지 않은 문제 같아요. 자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명백한 듯 보이지만 가끔 책임이 기존 세대가 자신들의 틀속에서 편안하게 지내고자 만들어낸 규제 같거든요. 언어도 유기체와 비슷해서 살아 꿈틀대며 변하는 속성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그 역동성의 맨앞에 서 있죠. 전 그들의 무책임을 오히려 생생한 삶으로 긍정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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