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실연의 상처 앞에 선 사람에게 우리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건넨다. 아무 효과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 말은 습관적으로 상대에게 건네진다. 그말은 그만큼 상투적이다. 하지만 그 말의 실질적 효과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다만 말의 상투성이 그 말의 실질적 효과를 집어 삼키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같은 말을,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내보내고 받은 실연의 상처에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시인에게서 달리 들었다. 시인은 황병승이었으며, 시는 그의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 실린 「가려워진 등짝」이었다.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찌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찌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 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찌부야 찌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찌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에 걸린 늙은 찌부를 들쳐 업고
찌부가 찌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황병승, 「가려워진 등짝」 전문
한해 전에만 해도 실연의 상처는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하고 바랐”을 정도로 시인을 힘들게 했다. 힘이 들면 힘이 빠진다. 너무 힘이 빠져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개에게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도 입을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힘든 순간에도 시간이란 상투적인 처방전의 약이 계속 시간을 흘려보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시인은 시골집에 내려가 강아지에게서 받았던 위로, 그러니까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무언의 위로를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에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라고 살짝 변형하여 건넨다. 위로는 받으면서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위로를 건네면서 또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한해가 흐르고 다시 이맘 때가 되었을 때 작년의 이맘 때를 돌아보는 시인은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간지”럽다고 느끼기에 이른다. 시간이 이제 어느 정도 상처를 치유한 것이리라.
실연의 상처 앞에서 시간이 약이라는 상투적이라는 말은 아무 쓸모가 없겠지만 사실은 같은 뜻인데도 시인의 시는 많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는 누군가 실연을 당하면 이게 무슨 쓸모가 있겠냐 싶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이 시를 너에게 읽어주고 싶다며 황병승의 시 「가려워진 등짝」을 읽어주고 싶어졌다.
(2013년 8월 1일)
**인용된 황병승의 시는 다음 시집에 실려있다.
황병승 시집,『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3
6 thoughts on “시간이 약이다는 말의 시적 변주 —황병승의 시 「가려워진 등짝」”
해설 없이 이 시를 대하면, 특별한 감흥 없이 그래서 뭐,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시인이 보면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같은 느낌이 별로 안 들고,
무슨 넋두리 같은 말의 상투성이 시어나 시 전체에 스며 있는 듯 해서요.
쉬운 말들을 쓰고 있는데, 은근히 어려운 구석이 있는 시 같아요.
이게 내가 지난해 실연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시간이 약이더라 이렇게 얘기했다고 생각해보면 이 시가 그런 말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느낌을 풍긴다는 건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실질적인 얘기를 하면서 효과는 하나도 전하질 못하는데 시인은 똑같은 얘기에 정말 1년의 시간을 담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자주 사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목표가 일년에 12권.
한달에 적어도 한권은 사보자..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현재까지는 이웃분들에게 선물도 보내고 해서 계획량은 초과 달성했는데요.
그런데 일년에 시인분들이 시집을 출간하는게 대체 몇권이나 될지요..
그렇다면 한사람이 1년에 12권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닐듯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 시피….한사람이 1년에 12권정도 소화해낸다면
시인들이 그렇게 우울한 시를 안써도 될듯합니다.
생활고를 하소연 하는 시인분들 글을 읽으면 인간의 자괴감이 느껴져서요..
하루에 한끼도 밥안먹으며 배고파서 난리칠텐데
시인의 가슴에서 나오는 마음의 양식은 안먹어도 배고푼줄 모르는 불감증 ㅠㅠ
하기사 글쓰는작가들은 농부와도 같죠.곡식같은 언어를 만들어 내니말입니다.
어떻게 허기져서 안먹고 살수가 있나요 ㅎㅎㅎㅎ전 많이 먹을랍니다~
감사합니다.요런 해석포스팅 가끔해주세요..사진 담을때 많은 도움됩니다.
전업시인은 거의 본적이 없는 것 같구요..
믾은 수가 대학에서 알바로 교수를 하고 있어서
먹고 사는 건 괜찮을 듯 싶기도 해요.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사는게 어렵겠죠.
그런 걸 떠나서 시집사서 읽어주는 분은 고맙기 이를데 없죠.
오호 이시집 제 불로그 이웃 한분에게도 선물했던.시집이네요.와우…
약간.어렵다며 감상평 받았는데 이 포스팅 글 꼭 읽어 보시라고 전해 드리겠슴니다.ㅎㅎㅎㅎ
해브굿밤되시고…
뭐 침대가 과학이라지만.
잠들때 침대가 시집이면 좋겠네요.ㅎㅎㅎㅎ
난해하기로 유명했던 시인이죠.
이 시집은 그래도 잘 읽히더라구요.
시집을 자주 사주시는 군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