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 그리고 자유

나는 지금 아일랜드 출신의 록 그룹 코어스의 런던 공연실황을 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선은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에 얹혀 있으며, 그들의 공연을 나에게 영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매체는 DVD이다.
이 공연 실황은 기존의 텔레비젼이나 비디오와는 구별되는 또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접해온 그간의 영상은 편집자가 재단한 화면이다. 편집자는 카메라가 잡아내는 다양한 영상 가운데서 적절한 부분을 고르고 뽑아서 우리들이 최종적으로 접하게될 영상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영상을 받아들일 뿐 선택권은 없다. 그러나 DVD에선 그 양상이 달라진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에게 좀더 폭넓은 선택권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코어스의 공연 실황에서 그들이 드림스를 부를 때 나는 우리들이 흔히 보던, 그 영상, 그러니까 각각의 멤버나 관중석, 또는 무대를 번갈아 오가는 상투적인 그 영상을 벗어나 리드 보컬인 안드레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카메라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는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안드레아를 본다는 것은 약간 식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화면은 리드 보컬을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의 상투적 영상을 통해서도 많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만 화면에선 그 영역을 크게 배정받지 못하는 멤버의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드럼 연주자인 캐롤린은 지금까지의 영상에선 거의 화면에 얼굴을 내비치지 못한다. 그녀는 소리에선 분명한 영역을 할애받고 있지만 화면의 안배에 초점을 맞추면 전혀 그렇질 못하다. 그러나 DVD에선 바로 그녀에게 화면의 독점적인 할애권을 안겨준다. 그 할애권은 나에겐 그녀에 대한 선택권이 된다. 그리하여 내가 캐롤린을 선택한 순간, 나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드럼 스틱과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내내 시선에 담아둘 수 있다. 그 경우 이제 그녀가 화면의 주축을 이루고 안드레아의 노래 소리는 배경으로 물러선다.
이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가 열고 있는 새로운 지평의 한 예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는 그냥 좀더 성능이 뛰어난 매체의 등장일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점점 더 디지털화 되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그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자유의 확대에 대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예로 든 코어스의 경우, DVD 매체는 각각의 구성 멤버 모두에게 공평한 화면 안배의 기회를 안겨주며, 그들의 팬들에겐 멤버들 하나하나를 선택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바로 이러한 공평한 기회의 분배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 아닐까.
나는, 사람들, 특히 이 땅의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와 인터넷이 갖고 있는 이러한 자유의 지평에 눈을 떠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순히 효율적이고 편리한 도구의 의미를 넘어 그 속엔 무한한 자유와 저항의 씨앗이 숨쉬고 있다. 아마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세계는 큰 돈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아니라 사실은 자유를 확대할 무대란 점이 그 본 모습인지 모른다.
–서울 시립대 신문, 2002년 5월 2일자

2 thoughts on “디지털 세상, 그리고 자유

  1. 가끔 수 많은 기능을 탑재한 휴대기기가 얼마나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까 계산해봅니다………

    1. 저도 제 컴에 깔아놓은 프로그램을 다 쓰는 건 아녜요. 어떤 건 한번 들여다보고 그 뒤로는 한번도 쓰지 않는 것도 있구요. 아날로그 세상에선 안쓰면 짐이데.. 디지털 세상에선 있어도 짐은 아니라서.. 그냥 내버려두게 되요. 그러다 컴터 새로 살 때 정리하는 듯 싶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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