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 흐릿한, 분명한 세계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1
우리들 눈앞의 세상은 그리 모호한 편이 아니다. 아니, 반대로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해 보이기 일쑤이다. 만약 시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면 시 또한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한 그림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니는 자신의 시세계가 그런 명확하고 분명한 세계와는 정반대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의 뒷표지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시를 가리켜 “희미한 암시”나 “흐릿한 리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궁금증은 두 가지이다. 왜 자신의 시를 “희미한 암시”나 “흐릿한 리듬” 같은 것으로 가져간 것일까? 대개의 시인들은 명징한 이미지의 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궁금증 하나는 그의 시가 정말 희미하거나 흐릿할까 이다. 그것이 이제니의 시집을 마주하고 내가 가진 두 가지의 의문이며, 시집을 읽는 여정은 그 답을 찾아보는 과정이 되었다.

2
이제니의 시가 희미한 암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은 결국은 현실이 실제로는 우리들의 경험과 달리 그다지 명확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도대체 현실은 그에게 어떠했던 것일까.
시를 통해 예를 구해보자. 시인은 시집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 바로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를 “코끼리는 간다//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라고 시작한다. 나는 아프리카 초원을 상상했다. 그 초원을 코끼리들이 줄을 지어 가고 있다. 간혹 늪지대를 건너기도 한다. 늪지대를 건널 때는 코로 물을 빨아들여 등에 시원하게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 “왔던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코끼리의 길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코끼리는 길을 오고가고 있다. 먹을 것을 좇아 그렇게 초원과 늪지대를 거쳐 이동하는 것이 코끼리의 삶이다. 비교적 분명하고 구체적인 풍경이며 그 광경을 옮긴 듯한 시도 그다지 모호하지 않다. 만약 이런 광경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면 당연히 내 눈을 채운 것은 코끼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 순간 초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옮겨간 시인의 시선 속엔 코끼리의 발밑에 밟히는 잔디가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발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라고 말한다. 설마 잔디이기야 하겠는가. 아프리카 초원이니 잔디라기보다는 그냥 풀일 것이다. 이 순간 시는 조금 모호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 초원은 멀고 잔디는 가깝다.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것은 초원의 풀이 아니라 잔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잔디를 밟고 지나갈 때 잔디에게 우리는 아프리카 초원의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세상의 코끼리이다. 모호하긴 하지만 빈 시의 행간을 이렇게 채우다 보면, 순간 우리는 초원을 이동하는 코끼리를 보면서 코끼리의 발밑에 밟히는 풀들을 걱정한 시인의 시선이 우리의 현실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초원의 풀을 걱정한 시인의 시선이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코끼리는 먹을 것을 찾아 초원을 걸을 수밖에 없고, 그때마다 풀을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도 가끔 잔디밭에 들어가 그 푸르고 부드러운 촉감을 발밑에 느끼며 휴식의 한순간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도 그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시인에게도 달리 방도는 없다.
우리가 그렇게 방어를 할 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부분

미안합니다는 아마도 코끼리의 말이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는 아마도 밟힌 잔디의 말이었을 것이다. 달리 어쩌겠어라는 태도의 세상과 미안합니다와 괜찮습니다를 주고 받는 세상은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달리 어쩌겠어라는 세상이 우리의 현실인 반면, 후자는 그보다는 훨씬 따뜻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건 실제 세상은 아니다. 그건 시 속의 세상일 뿐이다. 미안합니다와 괜찮습니다는 실제로는 코끼리와 잔디가 주고 받는 말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시인의 ‘혼잣말’이다.
그럼 이제 시인은 어떻게 될까.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어쩔 줄 몰라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바로 그것이 시인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처지에 내몰려도 여전히 “코끼리는 간다.” 그것이 현실이다.
아프리카 초원을 이동하는 코끼리에서 자세를 낮추어 그 코끼리에 밟히는 초원의 풀로 옮겨간 시선이 우리 세상의 잔디로 옮겨와 시인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드는 이 과정은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체로 아프리카 초원의 코끼리를 볼 때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시선은 대개 정면을 향하여 풍경의 중심이 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코끼리의 발아래로 약간의 각도를 트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코끼리에게 밟히는 초원의 풀을 우리의 발아래 밟히는 잔디로 가져오는 것은 더 어렵다. 아프리카와 우리의 세상과는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선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이 코끼리와 아프리카에 묶여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현실을 벗어나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명확하고 바람직한 인식의 세계일까. 이제니의 시를 읽고 나면 그건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잔디를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코끼리가 미안합니다란 말을 잔디에게 건네고, 잔디 또한 괜찮습니다며 코끼리의 무게를 잠시 짊어져주는 세상이 훨씬 괜찮아 보이지 않냐고, 어렴풋하지만 그의 시가 우리에게 슬쩍 암시를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시는 사실 모호하지 않게 읽힌다. 시는 시선을 약간 돌리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시선의 각도를 약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시선을 완전히 뒤로 돌리는 것이다. 시선이 정면에 고착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그건 몸을 완전히 돌려야 가능한 일이다. 부엉이는 그런 점에선 우리와 좀 다르다. 부엉이는 몸을 돌릴 필요가 없다. “부엉이는 머리를 돌”리며, 그건 “앞을 바라보듯 뒤를 바라보는 몸”(「달과 부엉이」)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엉이가 아니다. 그래서 뒤를 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행간을 채워가며 읽어가다 보면 이제니의 시가 그렇게 모호하진 않다.
또다른 예를 하나 살펴 보자. 이번에는 양상이 좀 다르다. 우리가 어디 동물원에 갔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앞에서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는다. 잠시 후 또 한 마리가 날아와 옆에 나란히 앉는다. 모호한 구석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보통은, 야, 앵무새다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반응한다. 물론 시인의 반응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가지가 있다
가지가 하나 있다

하나의 가지 뒤에 또 다른 가지 하나가
또 다른 가지 뒤에는 앵무가 하나 온다

앵무는 날아온다 날아와서 앉는다
가지 위에 가지 위에 가지런히 가지 위에

가지 위에 앵무 하나
가지 위에 앵무 둘
—「가지와 앵무」 부분

시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에겐 이게 도대체 뭔가 싶겠지만 말들의 배치에 주목하면 누구나 쉽게 말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비슷한 말을 반복하거나 비슷한 음가의 말을 전후로 배치하면 말은 마치 물결처럼 리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물결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눈엔 리듬의 시각적 양상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이다. 가지는 그냥 가지가 아니라 어떤 리듬의 실질적 구현일 수 있다. 그 가지가 보여주는 리듬은 “가지가 있다”거나 “가지가 하나 있다”는 문장 하나만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 두 문장을 연속으로 배치하면 그때는 문장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대상이 보여주는 리듬을 드러내려면 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세상을 리듬을 통하여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건 세상을 볼 때 세상에서 어떤 리듬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가 되며, 또 세상이 모두 노래라면 그런 세상은 상당히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앞의 현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구체적으로 빛나고 있지만 실제로 그 현실은 “빛이 난반사되는 어두움”(「검은 것 속의 검은 것」)일 수도 있다. 또 그 구체적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공작이 꼬리를 펼치기를 기다리는 유년의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런 태도를 가지면 우리는 공작이 꼬리를 펼치지 않는한 공작을 눈앞에 두고 서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이제니는 “그러나 유년의 뜰을 서성이던 공작은 바닷가 마을을 떠나는 날까지도 꼬리를 펼치지 않았”고 기억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화가 나서 “공작을 가둔 허술한 철조망 너머로 몇 개의 돌을 던져 넣는 걸로 어떤 유년은 끝이” 났다고 덧붙인다. 그럼 그 “유년의 공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순간 시인 앞에서 꼬리를 펼쳐 주었을까. 사정은 그렇질 못하다.

그리고 다시 꿈속에서. 공작이. 그 공작이. 유년의 공작이. 음지와 양지를. 천천히. 거의 유령처럼. 거닐듯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지. 만졌지. 들었지. 그러나 공작은 여전히 꼬리를 펼치지 않았고. 이 세계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기미와 전조뿐이라는 듯이. 그 자신의 유령이 되어. 길게 길게 제 그림자를 끌고 가고 있었지. 공작은. 음지와 양지의 공작은…(하략)
—「나선의 감각 —공작의 빛」 부분

비록 공작이 꼬리를 펼치진 않았지만 시인은 이제 돌을 던져 꼬리를 펼치려던 유년의 태도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게 되었으며, 세상을 “기미와 전조” 속에 방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니가 찾아낸 그의 시세계가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그 세계를 가리켜 모호하고 흐릿하다고 말했다.
모호하고 흐릿하면 시를 읽는 사람은 괴롭다. 시를 읽고도 손에 쥐는 것이 없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이제니의 시세계는 그다지 모호하거나 흐릿하질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시를 읽으며 당혹해할 사람들이 염려되었는지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친절할 설명까지 남겨놓고 있다. 그 설명에 기대면 이제니의 시는 ‘말씀’보다 ‘목소리’에 가깝다. 시인에 의하면 목소리는 음의 몸이다. 나는 시인의 이러한 설명을 내 시에는 의미가 없으니 “소리의 질감”을 즐기는데 초점을 맞추고 읽어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몸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니 몸의 의미를 즐겨보라는 얘기로 받아들였다. 또 이제니는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늙은 탕자가 아니라 늙은 채로 다시 젊어진 탕자. 이것이 바로 내 시다”(「나선의 감각 —음」)라고 말한다. 나는 이 얘기는 우리가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고 있듯이 그의 시도 구체적 현실 속을 뒹굴고 있지만 그 현실 속에서 정면을 향하여 고착되어 있던 시선이나 시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관습을 버리면서 다르게 열린 세상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시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아울러 구체적이면서도 완고한 우리 앞의 현실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방법을 이제니의 시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그 방법은 우리가 쉽게 차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눈을 감는 것이었다. 시인은 시집을 시작하는 자리에 마련해놓은 시인의 말에서 자신은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간다”고 적어놓고 있다. 처음 이 구절을 접했을 때 나는 시인이 세상의 어둠을 보면서 동시에 그 어둠을 보는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이는 놀라운 재능이다. 보통 세상이 어두울 때 우리의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데 그는 그 순간 자신의 눈 속에 담긴 어둠을 보며 그 눈 속의 어둠과 함께 간다고 말할 수 있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시집을 읽어가다 「모르는 사람 모르게」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 속의 어둠”이 눈을 감는데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눈을 감는다. 무언가 보기 위해. 무언가 듣기 위해.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들판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같은 것…(하략)
—「모르는 사람 모르게」 부분

눈을 감으면 어떤 구체적 현실이라고 해도 우리 앞의 세상은 순식간에 지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눈앞이 어둠이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눈을 감자 오히려 우리의 앞이 열릴 때가 있다. 어둠이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로, 또 어둠이 “어둠만이 아닌 들판들”로 열리는 순간이다. 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세상이 더 잘보이는 듯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눈을 감으라는 얘기가 현실을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제니에게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현실을 향하여 정면으로 고착된 우리 시선의 습관을 버리는 순간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세상을 볼 때 시인이 이용한 방법이었겠지만 시를 읽다 벌어진 시의 행간을 채워야할 때도 매우 유효한 습관이었다. 나는 종종 시를 읽다 말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3
나는 집의 거실에 놓여있는 소파에 누워 이제니의 시집을 읽었다. 겨울의 거실엔 햇볕이 깊숙이 몸을 들여놓는다. 아침 나절에는 동쪽에서 거실을 엿보며 몸을 들이밀고 오후엔 같은 몸을 서쪽에서 들이밀며 몸의 각도를 아침과는 정반대로 바꾼다. 시집을 손에 든 내가 소파에 몸을 눕혔을 때 빛은 내 가슴 언저리에 얹혀 있었다. 나는 시집을 읽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시간은 다소 길어졌다. 그동안 아침에 가슴에 걸려있던 햇볕이 내 몸을 훑으며 천천히 움직여 발끝까지 비스듬하게 사선의 걸음을 옮겨갔다. 나는 오랫 동안 눈을 뜨고 싶지 않았고 빛은 시간이 오후 깊숙이 흐를 때까지 내 어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시가 집으로 들어온 빛으로 따뜻하게 길을 밝히며 내 몸을 지나갔다. 시를 읽은 경우는 많았지만 이번에는 시가 눈을 감고 누운 내 몸속을 흘러갔다. 모호하고 흐릿했지만 동시에 분명했다.
(『현대시』, 2015년 1월호)

**대상 시집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2014

2 thoughts on “모호하고 흐릿한, 분명한 세계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1. 모름지기 시는 소파에 누워 읽다가 사르르 눈을 감아야 제격이란 말씀이시네요.ㅋㅋ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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