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의 낭만 —박상수의 시 「기대」

Photo by Kim Dong Won

숙녀의 세상에서 남자의 마음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함께 하는
우아한 식사에만 실릴 수 있다.
설렁탕은 절대 안된다.

시인 박상수는 그의 시 「기대」를 눈앞에 앉아 있는 숙녀에게 “뭐 할까 이제?”를 묻는 한 젊은 녀석의 질문과 그 숙녀의 “글쎄……”라는 답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 두 줄의 텍스트만으로 질문과 대답의 당사자를 젊은 녀석과 숙녀로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러한 짐작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시를 다 읽었기 때문이며, 특히 대화 속의 여자를 숙녀로 짐작한 것은 이 시가 실려있는 시집의 제목이 『숙녀의 기분』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시는 숙녀 앞의 젊은 녀석은 전혀 들을 수가 없는 숙녀의 마음 속 얘기를 들려준다. 젊은 녀석에게는 “글쎄……”라는 말이 눈앞의 숙녀가 내놓은 대답의 전부였지만 그 숙녀의 마음 속 대답은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숙녀의 마음 속 얘기는 이렇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
면서, 너는 멍하니 나를 봤어 스케줄도 없이 나를 만났다니
장난일 거야

난 요즘 저녁도 안 먹고 아파트를 걸었어 허벅지 근육이
고장날 정도로 걸었다 3킬로나 뺐는데, 니가 나한테 이러
면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지난번 애도 이래서 전화번호를
바꿨는데

숙녀의 마음 속 얘기에 따르면 둘은 만나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자에게 다음 일정이 없다. 숙녀는 억울하기 짝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저녁도 굶어가며 몸무게를 3킬로나 뺐기 때문이다. 남자는 일정도 없이 숙녀와 만나는 자리에 나왔지만 숙녀는 그 자리에 나오기 위해 이미 며칠전부터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눈치없는 젊은 녀석이 “글쎄……”라고 답을 흐린 숙녀에게 다시 “그럼 그냥 거기 갈까?”라고 묻는다. 숙녀의 마음 속 대답은 이렇다.

거기가 어딘데, 니 거기가 어딘데, 아까 니가 설렁탕이나
먹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때부터 눈물이 났다 오늘쯤은
교외로 나갈 줄 알았어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서빙을 받고
싶었지 세상 모든 걸 내 눈에 담고 싶었다, 힐까지 신고서,
그래도 참고 설렁탕을 먹었는데……

그러나 숙녀의 이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말대신 숙녀에게서 나온 것은 눈물이었다. 눈치없는 젊은 녀석이 그래도 당황은 했는지 묻는다. “너…… 울어?”라고. 그러나 녀석은 눈물의 이유가 전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대책도 없다. 대책이 없을 때 남자들이 하는 일이란 담배를 꼬나무는 것이다. 숙녀의 속마음과 다음 행동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렇게 담배만 피우면 니가 심각한 줄 알지, 난 알아, 네가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걸, 나는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렸
어 발레파킹 아저씨도 나한텐 안 이래, 커피잔을 감싸쥐고
손을 떨었다 가방에서 카드랑 초콜릿을 꺼냈지 밤새 만든
수제 초콜릿, 너에게 밀어주었다

숙녀는 남자와 만나는 자리에 그냥 나오지 않았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밤새 “수제 초콜릿”을 만들었으며, 그건 초콜릿이라기보다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녀석은 영화본 뒤 숙녀를 설렁탕 집에 데려가 당황스럽게 만들더니 차를 마시면서 다음 일정을 숙녀에게 물었다. 숙녀가 드디어 젊은 녀석에게 짧게 한마디의 말을 내뱉는다.

어쩜 그렇게 내 맘을 몰라?

숙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숙녀가 입을 열었다고 하여 드디어 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숙녀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자리를 털어냈다.

일어서서 그대로 나와버렸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어, 니
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길을 내려갔다
너는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지 나는 살짝 더 빨리 달
리며 울었다

남자 녀석은 어떻게 했을까. 숙녀의 뒤를 쫓아갔다. 쫓아가면서 남자는 외친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고. 그리고 숙녀는 그때의 기분을 이렇게 요약한다.

니가 외치면 외칠수록 낭만적인 이 기분.
—이상 모두 「기대」에서 부분 인용

숙녀가 원하는 것은 낭만이다. 대개 숙녀는 낭만에 속아 현실의 늪에 빠진다. 그 낭만은 설렁탕집에선 나오지 않는다. 숙녀의 낭만은 교외에 있는 서구식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서빙을 받을 때 나온다. 숙녀는 그 낭만을 날로 먹으려 들지 않는다. 미리 며칠 동안 허벅지가 아플 정도로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살을 3킬로나 빼면서 준비를 한다. 낭만을 위하여 밤을 세워가며 수제 초콜릿도 준비한다. 숙녀의 준비는 마음씀이 깊다. 준비가 많아지면 낭만에 대한 기대도 더욱 높아진다. 남자가 그 낭만을 세련된 방식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숙녀는 그 낭만을 신파적 방식으로라도 채워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상수의 시 「기대」 속의 숙녀가 보여주는 태도에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탐하는 속물 근성의 여자를 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숙녀는 왜 그렇게 낭만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그것은 숙녀의 존재 가치가 낭만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남자의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마음을 얻고자 한다. 숙녀가 남자와 만나는 자리에 나오기 위해 며칠 동안 식사를 굶어가며 살을 빼고 밤을 새워가며 초콜릿을 만들 때 그녀가 준비한 것은 사실은 그녀의 마음이다. 또 숙녀도 그에 상응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남자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상하게 남자의 마음은 숙녀와 함께 먹는 음식과 숙녀를 데려간 장소에서 나온다. 물론 어떤 존재의 가치가 그가 먹는 설렁탕이 아니라 교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서빙을 받는 낭만으로 결정된다고 말하면 누구나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생각을 효과적으로 뒤집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숙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숙녀는 교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받는 서빙을 남자의 마음으로 혼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렁탕은 둘이 함께 먹은 음식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을 결핍한 음식이다. 숙녀는 자신의 마음을 내주고 자신이 내준 마음의 빈자리를 남자의 마음으로 채우려 한다. 문제는 남자의 마음이 남자가 마련하는 것들로 혼동이 된다는 것이다. 설렁탕에선 그 마음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숙녀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남자가 준비한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서빙이 남자의 마음이란 그 가치의 결정 체계는 가치를 어느 하나에 귀속시킨다. 그 체계 속에선 설렁탕으로도 함께 할 수 있는 남자의 마음이란 것은 없다. 그건 마음이 없음의 확고부동한 징표이다.
숙녀의 이러한 가치 결정 체계가 문제인 것은 남자의 마음을 얻으려 하면서도 그 마음의 자리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자리를 폭넓게 잡을수록 더더욱 남자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마음을 숙녀는 어렵게 얻으려는 모순을 범한다. 마음의 자리를 설렁탕과 함께 한 시간으로 넓혔다면 숙녀는 앉은 자리에서 남자의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숙녀는 쉬운 길을 어렵게 가고 있다.
젊은 남자 녀석이 실수하긴 했다. 설렁탕은 설렁탕대로,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은 그 음식대로 가치를 갖는 것이 정상이어서 설렁탕에도 마음을 실을 수는 있으나 그건 쉽지가 않다.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기는 더욱 어렵다. 같은 가격에 여자가 좋아할 음식을 골랐어야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하긴 딱보니 눈치 없는 녀석 같은데 뭘 기대하겠는가. 내가 살던 시대도 숙녀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것은 어려웠는데 지금도 여전했다. 또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여전히 실수를 범하고 있다. 남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숙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남자의 마음일 뿐이며, 다만, 그 마음을 실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뿐이다. 숙녀는 결코 속물적이지 않다.
(2015년 2월 18일)

**인용한 박상수의 시는 다음의 시집에 실려있다.
박상수 시집, 『숙녀의 기분』, 문학동네, 2013

2 thoughts on “숙녀의 낭만 —박상수의 시 「기대」

  1. 설렁탕을 먹으며 낭만을 날로 먹으려 들다니, 이 친구 실수한 게 맞네요.
    하다 못해 빵집이라도 갔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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