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의 탄생이었다.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이 시대의 죽음이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데이터로 저장하면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죽음은 죽음의 데이터를 Save하면서 끝난다. 생은 끝나도 죽음의 데이터를 살아남는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런 시대이다.
•영화는 이불을 올려 죽은 이의 얼굴을 덮는다. 내버려 두어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죽은 육체의 눈을 가린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보지 못하는데도 가려지는 것이다. 살아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살아있는 자의 눈은 누구도 가릴 수 없다.
•현대 의학은 고통 앞에서 종종 무력하다. 영화는 현대 의학이 병의 고통이 몰려오면 고통을 막아 환자를 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묶어놓는데 급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들이 고통 앞에서 고통을 후벼파는 것으로 더 큰 고통을 불러 우리의 고통을 잊으려 하기 때문이다. 때로 고통을 후벼파지 못하게 할 뿐, 몰려오는 고통을 막지 못하는 무력감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현대의 의학이다.
•두 번 정도 등장한 전통 장례 장면은 낯설었다. 검정색 일색의 옷 때문이었다. 옷은 삼베로 만든 전통 복장이었으나 색이 문제였다. 실제 장면이 아니라 머릿속의 상상이라서 그렇게 처리한 것일까. 아쉬웠다.
•영화는 죽은 사랑, 혹은 죽어 가는 사랑과 산 사랑의 사이에 선 한 남자를 보여준다. 죽은 사랑은 보내야 하는 사랑이지만 보내는 동안 시선을 죽은 사랑에 묶어 놓는다. 죽어가는 사랑 앞에서 눈을 돌리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엄청난 가책을 댓가로 치루어야 한다. 그런데도 남자의 시선은 산 사랑을 향하여 뒤로 돌아간다. 물론 아무도 알지는 못한다.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없다. 그러나 본인은 안다. 사랑은 일종의 중력같은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젊은 여자가 강력한 사랑의 중력을 갖는다.
•영화는 세 가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준 세 가지의 사랑 중 첫번째는 눈으로 들어오는 사랑이다. 우리의 눈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 슬쩍 한번 보는 것만으로 여자가 그 눈으로 걸어들어와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두 번 보고, 세 번 볼 때, 그저 보는 것만으로 여자는 우리 몸에 새겨진다. 그래서 눈은 말할 수 없이 무섭다. 어떤 여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 여자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눈으로 들어오는 사랑은 남자의 몫이었다.
•영화가 보여준 눈으로 들어오는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사랑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타인마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게 사랑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늙은 이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젊은 이들의 사랑이다. 안성기는 그것을 안다. 그가 추하게 늙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추하게 늙은 것이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눈으로 들어온 사랑과 눈의 탐욕은 어떻게 구별이 가는 것이냐고. 그것을 구별하여 보여주는 것이 배우의 연기다. 눈으로 사랑이 들어오면 대상이 눈에 담긴다. 눈이 탐욕으로 탁해졌을 때는 시선이 대상의 몸을 파고든다. 안성기의 연기는 그 둘을 구별해준 연기였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안성기는 아내가 간직하고 있던 한 지갑 속에서 젊은 날의 그의 사진을 하나 발견한다. 다른 것은 태우지만 그는, 그것은 태우지 않는다. 우리는 젊은 날 만나 계속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젊은 날 만나 짧은 순간 사랑을 하고, 그 뒤로는 그 사랑을 간직하고 산다. 간직하고 살아갈 사랑만 있어도 행복한 것이다. 대개는 간직할 사랑도 없을 때가 많다. 안성기는 아내가 간직했던 사랑은 태우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준 세 가지의 사랑 중 두 번째는 오래 같이 산 부부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둘이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같이 살았을텐데 영화 속에선 둘이 섹스를 해도 사랑이 보이질 않는다. 왜일까? 같이 살고, 섹스한다는 것이 사랑의 충분 조건이 못된다는 얘기이다. 결혼했다고 결혼의 삶 속에 내내 사랑이 함께 해주진 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게 만든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같이 산 사이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영화는 그것이 수치의 감내라고 말한다. 똥을 지린 아내는 스스로가 죽고 싶도록 수치스럽다. 그 아내의 수치를 아내가 감내할 것 같지만 영화는 그 수치를 남편이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부의 섹스에서도 보이지 않던 사랑이 바로 그 순간에 보인다. 아내의 똥냄새를 감내할 때, 사랑이 증명이 된다. 사랑은 증명할 성격의 것은 아니나 그 순간에 내 눈에 사랑이 보였다. 사랑은 추한 것마저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을 마치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하는 회사의 일상처럼 감내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선 그 감내하는 사랑이 남편의 몫이었다.
•영화가 보여준 세 가지의 사랑 중 마지막 몫은 아내의 것이다. 그것은 다소 모호하고, 그래서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만약 진짜 내 짐작대로라면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는 물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했을까.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배달시킨 세 병의 와인은 아마도 그 사랑의 가장 확실한 징표일 것이다. 영화 속에선 그것을 시킨 것이 아내인지 분명하게 나오질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아내는 자신을 지우면서 그 와인을 시켰을테니까. 그것은 자신을 지우면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열어주려는 사랑이다. 자신을 지우면서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열어주려는 사랑은 숭고하면서도 동시에 고통스럽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의 어떤 사랑도 그 사랑을 넘어설 수는 없다. 영화 속에서 자신을 지우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열어주려는 사랑은 아내의 몫이었다. 난 문득 아내역을 맡은 김호정이 정말 뇌종양을 앓은 것인지가 의심스러워 졌다. 혹시 그 뇌종양이란 것이 섹스를 해도 사랑이 보이지 않는 건조해진 결혼과 자신의 남자 눈에 들어와 마음을 차지한 한 젊은 여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 여자가 겪게 된 고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뇌종양은 육체에 부속되는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늙어서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이 몸에 대한 탐욕과 뒤섞인다. 때문에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그 대상이 젊은 여자라면 몸을 섞는 순간 사랑은 탁해진다. 따라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때로 몸을 눈앞에 두고도 몸 가까이 몸을 두어선 안된다. 그 순간 사랑을 잃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랑과 일정한 거리의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영화는 사랑을 지켰다.
•추은주역을 맡은 배우 김규리가 불쌍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김규리는 아무 사랑도 보여주질 못했다. 안성기는 눈으로 와 마음을 차지하는 남자의 사랑과 수치의 감내로 증명이 되는 남편의 사랑을 보여주며, 영화가 보여준 세 가지의 사랑 중 둘을 가져가고, 김호정도 자신을 지워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열어주는 아내의 사랑을 보여주었으나 김규리에게선 아무 사랑도 보이질 않았다. 사랑을 갖지 못한 미모만큼 불쌍한 것이 없다. 김규리가 너무 불쌍했다.
•영화는 안성기가 다시 일상으로 돌와왔음을 암시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 일상이란 회사와 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에 도리가 아닌 줄 안다면서도 장례식장에서마저 해야 했던 회사의 일이 그것이기도 하다. 회사의 일들과 관련된 이들 몇몇 장면들과 그가 마치 회사일에서처럼 능률적이고 사무적으로 처리하여 딸에게 마치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풍긴 아내의 장례, 그리고 이제 그가 완전히 그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들에게 이 영화가 보여준 사랑에 대해 갈림길에 서게 만든다. 하나는 우리가 사랑을 그 일상과 맞바꾸고 살아가고 있다는 암시이다. 이 장면들의 암시를 이런 방향으로 받아들이면 그가 김규리와의 사랑을 몸으로 이어가지 못한 것도 그의 일상을 사랑과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을 얻었으나 그 댓가로 사랑을 잃었다. 또다른 하나는 그 일상이 사실은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암시이다. 이 입장에 서면 그냥 일상적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사랑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괄되는 그 삶 속에 뇌종양으로 죽어간 아내에 대한 사랑도 있고, 눈에 들어와 담긴 젊은 여자에 대한 사랑도 있다. 일상으로 지탱되는 삶은 모든 사랑의 뿌리가 된다. 이 갈림길에서 정답은 없다. 물론 영화는 후자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난 이에 대해선 반대이다. 내가 김훈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 정도 보고 싶은 영화였다. 영화관의 자리는 절반도 차질 않았다. 그 점이 많이 안타까웠다.
3 thoughts on “영화 『화장』에 관한 몇 개의 노트”
말미의 사랑의 갈림길이 조금 아리까리합니다. 어떻게 다른 건지?
덕분에 신새벽에 <강산무진>에 묶인 김훈의 소설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천생 신문기자네요. 저는 김훈 소설이 괜찮은데요.^^
제겐 김훈의 시각이 상당히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잘 안 읽게 되고.. 이런 시각이면 세상에 용서 안될 것이 있을까 싶어지면서 말예요. 하지만 김훈도 자신에게 있는 그 결핍을 아는 것 같아요. 어떤 인터뷰보니까 소설 속에선 젊은 여자와의 사랑이 실질적으로는 전혀 이루어지질 않았는데 영화 속에선 좀더 진전되길 바랐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좀 실망스러웠다고.. 그래도 자신의 결핍은 알고 있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소설에선 추은주에 대한 주인공의 플라토닉도 아닌 것 같은 가볍고 일방적인 사랑 비스무리한 게 묘사되는데, 다른 소설에서라면 어떤 진전을 기대하거나 응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소설에선 그런 느낌이랄까 존재감 같은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