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기 위한 음악인들의 공연,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가 그 세번째 자리를 가졌다. 공연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던 5월 25일 월요일에 홍대 롤링홀에서 있었다. 이번 공연은 전인권 밴드가 함께 했으며 단원고 2학년 5반 학생들의 얘기를 함께 들었다.
시작전의 공연장은 언제나 그렇듯 비어 있다. 곧 자리가 찰 것이다. 이 공연의 관객은 좀 특별하다. 공연의 자리를 채우면 무대에 오른 음악이 우리의 기억을 채우지만 이 공연의 관객들은 동시에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 기억이 된다. 이 공연에선 음악이 음악이면서 동시에 기억이다.
공연장의 입장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공연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관객은 단순히 공연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공연의 충만을 함께 가져다준다. 사람이 적은 공연장은 그래서 썰렁하다. 공연만으로 공연장을 채울 순 없다.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에선 그 충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기억의 충만이 된다.
<두번째 달>은 연주 밴드이다. 연주는 말없는 위로이다. <가라앉는 섬>으로 시작된 그들의 곡들은 상처난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을 말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OFUS는 재즈 밴드이다. <두번째 달>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말없이 연주로 그들의 심정을 전한다. 그들의 연주 역시 말없는 위로이다. 그러나 위로가 항상 따뜻할 필요는 없다. 때로 따뜻한 손보다 함께 해주는 분노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은 커녕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정부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이 분노할 때, 그곁에서 함께 하는 분노가 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될 수 있다. OFUS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곡은 <분노>였다.
공연의 중간중간에 세월호 유가족의 영상이 나온다. 단원고 2학년 5반 준민이의 어머니도 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사랑해, 아들”이라고 했다. 때로 “사랑해”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준민이 엄마가 사랑해, 아들이라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준민아, 우리도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사랑의 슬픔이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
펑크록 밴드 아이씨사이다의 곡들은 빠르고 신나다. 원래 빠르고 신나는 곡은 슬픔과는 잘 어울리질 않는다. 하지만 슬픔이 길고 오래가야 하는 싸움이 되면 신나는 노래가 큰 힘이 될 수 있다. 아이씨사이다는 그 힘이 되었다. 때로 템포 빠르고 신나는 곡도 슬픔의 위로가 될 수 있다.
공연과 공연 사이는 희생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름을 부르면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와서 꽃이 된다. 꽃이 된 아이들은 세월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매년 사람들 가슴에서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록밴드 네미시스의 음악은 특이하다. 밴드의 연주는 록인데 보컬은 멜로이다. 보컬의 용모도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곱상했다. 록은 소리치려 하지만 멜로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려 든다.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한게 지금의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나왔다.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엔 전하가 배어 있다. 그 때문에 그가 <그때 그 노래 소리>를 부르며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자유와 평화에 감전된다. 그가 자유를 외치고 평화를 노래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는 전인권이다.
그가 예스터데이를 불렀다. 예스터데이는 비틀즈가 부를 때는 잔잔한 회상의 노래였으나 그가 부르자 어제는 하나 남김없이 짜내 다시 오늘로 갖고 싶은 과거였다. 아마도 그가 예스터데이를 부른 것은 한해전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버린 시간을 다시 짜내, 오늘로 되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인권이었다.
많은 노래가 그의 노래였지만 또 더이상 그의 노래가 아니기도 했다. 그가 노래를 하다 노래를 잊으면 많은 관객들이 그의 노래를 대신 불렀다. 그의 노래는 이제 모두의 노래였다. 그는 전인권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무대의 조명은 그다지 현란하지 않았다. 그가 노래 부르면 사실 그의 노래로 충분했다. 그는 전인권이었다.
그가 말했다. “때로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의 양심이 됩니다. 나는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노래불렀다. 그의 노래와 함께 세월호 참사는 기억될 것이다. 그는 전인권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할아버지가 다 된 록커 에릭 크랩튼이 여전히 기타치며 노래부르는 세상이 부러웠다. 그건 늙었으나 여전히 젊은 세상이었다. 록은 젊은이들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러워할 것이 없었다. 우리에겐 전인권이 있었다.
그가 불후의 명곡 <행진>을 부른 뒤에 말했다. “이번 곡이 마지막 곡이었는데 앵콜 두 곡, 아니 세 곡 더할께요.” 관객들은 졸지에 앵콜을 외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앵콜의 역습이었다. 공연은 여러 차례 다녀봤지만 앵콜 한번 외치지 못하고 앵콜 세 곡의 역습을 받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역시 전인권이었다. 그는 세 곡, 들국화의 노래 <세계로 가는 기차>, 레드 제플린의 노래 Rock and Roll(간만에 들은 나는 Black Dog으로 오인을 했다), 그리고 로드 스튜어트의 노래 Sailing을 앵콜로 불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공연을 마쳤다. 우리에게도 늙었으나 여전히 젊게 살아 있는 록커가 있었다.
2 thoughts on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 세 번째 공연”
우와~ 그는 전인권이었군요.
삘로 봐서는 dong님도 무대에 서셨다면 무척 환호 받으셨을듯.^^
행사 주관하는 처자가 겉으로만 보면 오늘 무대는 꼭 오라버니가 올라가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