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치과에 갔다. 이빨 하나를 뽑았다. 졸지에 앞니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생겼다.
뽑힌 이빨의 틈새로 혓바닥이 자꾸 들락거린다. 틈새는 혓바닥이 드나드는 창이 되었다. 혓바닥은 틈새를 창삼아 혓바닥을 내밀고 윗입술을 만난다. 예전에는 이빨을 타넘어가야 만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혓바닥이 이빨을 타넘어 윗입술의 안쪽을 만나러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빨이 뽑히고 나자 그 틈으로 빈번하게 윗입술을 만난다. 혓바닥은 그 부분의 촉감에 중독이 되어가는 듯하다. 혓바닥만 그런 것은 아니다. 윗입술의 안쪽도 입술을 이빨 쪽으로 조금이라도 붙이면 빈 틈새로 살을 디밀고 혓바닥이 어디있는지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무너진 이빨의 벽이 만남을 만들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놀리려면 우리는 혓바닥을 내민다. 그런데 그렇게 놀리면 누구에게나 들통이 난다. 난 이제부터 그렇질 않다. 이빨빠진 틈새로 혓바닥을 내밀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다. 이제부터 나는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놀릴 수 있다. 그것도 혓바닥으로.
이빨은 뺀 것은 이 이빨이 다른 이빨과 달리 나란히 나질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빨은 마치 항구와도 같았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그 이빨의 항구에 정박을 하고 있다가 세상으로 출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바깥 세상으로 나오려는 것이려니 생각을 하고 그 이빨을 방치해 두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말들의 정박지를 이빨 가운데 갖지 못한다. 말하자면 정박할 틈새도 없이 세상으로 쏟아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말들의 항구를 내 이빨 가운데 갖고 있었다. 불편하면서도 그 이빨을 그대로 둔 이유였다.
그러나 이빨은 말들의 항구로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빨은 말들의 항구인 동시에 음식을 씹는 기본 기능을 버리지 못한다. 음식을 씹을 때면 안으로 들어간 항구로서의 이빨은 아랫 이빨과 부딪치곤 했다. 물론 음식을 씹을 때 윗니와 아랫니가 맞물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맞물림이 허용되는 것은 사실은 어금니에 국한된다. 어금니가 서로 맞물려 음식을 씹는다는 행위에 들어갈 때 앞니는 아랫니가 윗니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앞니는 서로 부딪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간 내 앞니는 아랫니의 길을 가로 막았다. 그러자 아랫니는 윗니를 들이박았다. 그러니까 내 안의 내 이빨이 내 이빨의 움직임을 방해하자 길을 비키라며 들이박는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간혹 살짝살짝 그런 일이 있었으나 둘은 잘 비켜가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충돌이 컸다. 내 아랫니는 더 이상 위를 견디지 못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잘 비키면서 살았는데 이제 너무 안쪽으로 들어갔나 보다. 항구를 버리고 생존을 택하기로 했다. 항구를 지키려다 굶어죽을 수는 없다.
말들의 정박처는 잃었지만 말들의 벽 하나가 무너진 셈이기도 하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내 통제를 벗어날지도 모른다. 나도 통제할 수 없는 빈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정박처를 가졌다가 세상으로 출항하는 말들과 살았으나 이제는 통제를 견디지 못하는 말들에게 틈새를 주는 삶을 살 것이다.
2 thoughts on “앞니 없는 인생”
난생 처음!
저도 잘 안 다니지만, 천호동 치과들 문 닫을 뻔 하다 기사회생했겠네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이빨들 싸움에 내가 고생할 줄을 몰랐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