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아가는 어떤 여정 —김민정의 시세계

『현대시』 2016년 5월호
『현대시』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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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는 것이 시를 받아들이는 일일 수 있다. 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즐기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예를 들어 시에 사용된 언어의 파격이 클 경우, 시를 받아들이는 일이 상당히 힘들어질 수 있다. 시의 경계에 대해 완고한 고집을 갖고 있고, 그 고집을 시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할 경우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민정의 시에서 예를 구해보자. 그의 시 가운데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꼭 한 달 만에 차였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는 시가 있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는 뒷얘기가 이렇게 이어진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부분

만난 첫날 결혼하자고 했다니 첫눈에 사랑을 느낀 것이고, “시 쓴답시고?”라는 말로 빈정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김민정이 시인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시인인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김민정이 수용이 되질 않으며, 그것도 그가 생각하는 시적인 표현을 입에 올렸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시인을 사랑한다면서 시적 표현마저 수용이 되질 않는다. 왜일까. 그가 일상의 경계에 대한 완고한 고집을 갖고 있고, 시는 그곳에 들어와선 안되며 시 속에서만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일상의 경계를 고집하는 자에겐 엄청난 파격의 세상이다. 시인은 “그런 게 시였”냐고 반문하며 자신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시에서 한참을 더 나간 파격이 김민정의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가 궁금해진다. 시인이 그 남자를 가리켜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예전엔 미처 몰랐”다며 “사연 끝에 정중히/號 하나 드”린다고 건네는 것이 “son of a bitch”이다. 남자가 수용할 수 있는 파격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때로 어떤 파격은 사랑을 입에 올린 사람도 수용을 하지 못한다.
비슷한 또 하나의 고백이 있다. 그 고백에서 김민정은 “사랑해라고 고백하기에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게 “너무 좋아 뒤로 자빠지라는 얘기였는데 그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며 그 흔한 줄행랑에 바쁘셨다”고 전한다. ‘사랑해’라는 고백 앞에 오줌을 싸버리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파격이다. 그러나 대체로 사랑은 어떤 파격도 가능하게 한다. 파격을 불러온 것이 사실은 그 사랑해라는 고백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해라는 고백은 사랑을 고백했으면서도 그 고백으로 수용해야할 파격을 감내하질 못한다. 시인은 고백의 당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줘도 못 먹은 건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시, 시, 비, 비」 부분

시를 읽을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시의 경계를 너무 완고하게 그으면 그 경계를 심하게 벗어난 언어가 파격이 되기 쉽고 그 파격이 지나치면 자꾸 파격에만 눈이 가면서 그것이 시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은 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사랑할 때 국경을 지우듯 때로 시를 읽을 때도 경계를 지워야 한다. 경계를 지우면 어떻게 될까. 우와, 세상에 이런 시도 있었다는 즐거움과 함께 시의 세상이 확장된다. 나는 즐겁게 김민정의 파격을 받아들였으며, 간혹 킥킥 거리면서 재미나게 읽었다. 시를 그렇게 받아들이면 파격에 더이상 주목하지 않게 되며 그러면 어떤 파격도 시의 이름아래 자연스럽게 수용이 된다. 그리하여 내가 그의 시에서 접한 것은 사랑을 찾아가는 어떤 여정이었다. 그 여정은 특이한 그의 탄생 설화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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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나 김민정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염통’ 속에서 태어났다. 그 사연은 이렇다.

담배 피우다 담배 먹은 엄마가 글쎄 날 염통 속에서 건졌다지 뭐예요 아마도 연기가 매콤해서 내가 재채기를 했나 봐요 훌쩍거리는 내 콧소리를 듣고 주먹을 입에 넣어 바람 빠진 럭비공 같은 염통을 턱 하니 뽑아냈다나요 염통 껍데기에 크림치즈를 바르고서 시뻘겋게 달군 석쇠에 지글지글 구웠더니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내가 혈관솔기를 뜯고 나와 까꿍 했대요
—「회상의 회상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 2」부분

그렇다고 시인의 어머니가 그를 염통 속에서 잉태한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그를 자궁 속에서 잉태했으나 그 자궁 속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바나나 나라에서 바나나씨로 날아온” “한 아이”가 시인의 “탯줄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십여 센티 장딴지로 혼자 굵어”가더니 자궁을 그의 집으로 차지하기에 이른다. 자궁은 그곳에 잉태된 아이가 열달 동안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자라는 안전한 공간이지만 또다른 한 아이의 출현으로 더 이상 그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게 된다. 시인은 “그 아인 살색 샤프심처럼 삐쩍 곯은 날 염통까지 단번에 걷어차버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시인은 염통 속에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염통으로 쫓겨난 것이다.
자궁은 모성의 공간이고 우리는 모성이 아이를 보호한다고 믿고 있다. 모성은 어머니의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아이 때는 재미나게 놀면서 자라야 한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그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성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경우가 흔하다. 대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어머니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어머니 아래서 발생하곤 한다.
사실 자궁엔 모성이 없는지도 모른다. 모성은 자궁 속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믿고 있던 아이가 염통 속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염통 속에 숨어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를 건져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자궁 속의 평화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아이들을 경쟁에 내몰고 있지만 그래도 김민정은 그 세상을 피하여 자랄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었으며, 그 공간이 어머니의 염통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가 가진 축복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으리라. 그리고 그 축복이 그가 김민정으로 자라는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어릴 때 어디에서 자라든 우리는 결국 세상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 김민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 세상은 불행히도 염통으로 쫓겨나야 했던 자궁 속에서의 경험만큼이나 당혹과 혹독함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가 부딪친 세상은 먼저 모두가 똑같은 세상이다. 다른 얼굴들이 살고 있는데도 똑같다. 심지어 정반대의 극에 서 있는데도 똑같을 때가 있다. 아마도 어느 날 시인은 경찰서에 가게 되었는가 보다. “철창 안은 온통 민숭민숭한 문어대가리들뿐”이라는 대목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머리를 빡빡민 조직 폭력배들이 무더기로 검거되어 들어왔던가 보다. 그들이 “너나없이 우글우글 떠들어대”자 경찰서의 ‘황 형사’가 “아가리 안 닥쳐?”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문어대가리들을 박치기시”킨다. 그러나 그 순간 경찰서 안에 있던 시인의 눈에는 폭력배와 형사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다급한 듯 삐뚜름히 가발을 뒤집어쓴 채 해장국을 이고 온 여자의 젖퉁이를 주물럭대는 황 형사야, 잊지 말아요. 너도 문어대가리야!
—「박치기하면서 빛나는 문어」 부분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체로 확산이 된다. 시인의 “아빠 친구 종민이 아저씨”는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은 “1호선 주안행 열차를 타고 보니 아저씨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순간의 허상이 아니다. “쌍둥이도 아닌데 아저씨는 한 사람이 아니었”고 “아저씨가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아 가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아저씨로 몸”을 갈아입고는 모두 ‘종민이 아저씨’가 된다.

…열차 안은 종민 아저씨들만 내렸다 종민 아저씨들만 올라타 내내 종민 아저씨들로 붐볐어요…
—「김종민 아저씨」 부분

문제는 이러한 정체성 상실에 시인도 휩쓸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거울을 꺼내 들었을 때 어라, 종민 아저씨는 거기 내 손거울 안에도 들어앉아 계셨어요”라는 대목에서 그런 상실의 순간이 읽힌다.
시인은 헬스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가리켜 시인이 “약속이나 한 듯 수십 대의 러닝머신 위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뛰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 풍경의 세상은 약속이나 한 듯이 획일화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그 약속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약속을 못 했기에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흔해빠진 레퍼토리」 부분

시 속에서 반복된 “약속이나 한 듯”이란 말 때문에 “약속을 못 했”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었겠지만 그 말의 실제 의미는 획일화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지켜가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고집이 될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살면 내일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내일이 열리진 않는다. 다만 그 자신을 잃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시인은 좀더 구체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겪게 된다.
우선 그 세상에서 시인이 겪게 되는 것은 불평등이다. 김민정에게서 그 불평등은 여자로서 겪게 되는 불평등이다. 그는 그 불평등을 이렇게 요약한다.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거다
—「陰毛라는 이름의 陰謀」 부분

시인이 말하는 마르크스도 미처 예상치 못한 그 불평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보통 우리는 성차별이나 불평등을 말할 때면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지만 김민정이 느끼는 불평등은 음모, 그러니까 여자의 은밀한 곳에 나는 털에서 온다. 그 경험은 어느 날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시작된다. 산부인과를 찾아간 것은 ‘자궁경부암’의 진단을 받아보기 위함이었다. 산부인과의 여의사는 자궁의 상태에 대한 설명 끝에 “제모 어떠세요?”라고 물으며 털의 제거를 권한다. 이유는 “휴가철인데 비키니 라인 신경쓰셔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 경험은 거창으로 조문을 가는 날 들렀던 “안성휴게소 화장실”의 스티커에 겹쳐지면서 증폭이 된다. 스티커에는 “여성 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여성 무모증 빈모증 수술하지 않고 완전 해결!”이란 문구가 담겨 있었다. 여성에게 털은 있어도 문제이고 없어도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여성에게만 강요된다는 측면에서 불평등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사회 인식이 빚어낸 이러한 불평등과 그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 시 속에서 시인은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이라고 고백한다. 라푼젤은 딸이다. 그러니 여자이다. 동화 속에선 머리가 길지만 김민정의 시 속에서 그 라푼젤은 머리가 아니라 털이 난다. “살 썩고 난 부엉이 같은 내 얼굴에서 솟고라지고 있는 이 털들을 좀 보세요 대체 이게 뭔일이래요?”라는 구절은 털이 난 부위와 그 양상을 구체화한다. 사회는 여자에게만 그 털의 제거를 강요한다. 그런데 무성한 털의 라푼젤은 그 털을 뽑아버리고 여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쀼죽쀼죽한 털”을 가진 “날으는 고슴도치”가 된다. 그리고는 “사방팔당 불붙은 가시를 발사한다.” 아마도 그것이 이 세상의 불평등에 대해 김민정이 대응하는 기본적인 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까칠한 공격적 태도의 여자이다.
김민정이 마주한 세상의 또다른 모습은 폭력적 양상을 띈다. 그 폭력은 가정의 지붕아래 은폐되고 가려져 있는 폭력인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를 들여다 보면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고 있는 어느 가정의 ‘아버지’가 보인다. 가정 폭력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김민정의 시적 대응은 우리에게 분노보다 웃음을 불러온다. 시 속에서 그 집안의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어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무조건 용서를 구해야 하는 아이들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도이며, 그들의 기도는 “미끄러져라 미끄러져라”는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왁스를 발라 마루를 닦았어요 아버지의 양말 바닥에도 구두 굽에도 호호 불어 왁스를 칠해놨어요 우리는 모두 조심조심 걷기로 약속했어요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는 참말 몰랐으면 좋겠어요”라는 문구는 그들의 기도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나간 것은 미끄러운 바닥에서 뒤로 넘어서 뇌진탕으로 숨지는 그 집안의 아버지였다. 나는 그 순간 킥하고 웃고 말았다. 웃음은 내가 그 집안의 아이들에게 보낸 동조의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분노 속에서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킥하고 새어나온 웃음 속에서 하나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아버지는 그 기도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닦아 놓은 마루에서 넘어져 죽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定時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제목이 그런 현실을 암시한다.
물론 현실에선 가정 폭력을 휘둘러온 당사자가 죽기도 한다. 보통 죽어갈 때면 자기 삶을 돌아보며 죄를 반성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김민정의 시 속에선 그렇지도 않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사냥꾼도 아닌 내가 도끼를 넷씩이나 두었다니”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도끼가 딸을 지칭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도끼와 딸의 사이에 놓인 연관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경험에서 온 것이다. 동네의 아는 분이 있다. 그 분의 아들이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았다. 말하자면 손주가 태어난 것이다. 지나는 길에 동네 사람 중 하나가 아들이냐, 딸이냐를 물었다. 그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끼로 팍 찍었더구만요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여자가 그렇게 표현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시 속의 문구는 곧바로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인은 세상의 딸들을 도끼로 찍어버린 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대응했다.

下官은 이제 끝났어요, 아버지 그만 아가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요
—「마지막 舌戰」 부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꿈꾸면서 가정을 이루고 관계를 가질텐데 현실은 이 세상에 사랑이 있는 것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 의심은 주로 타인에게서 건네 듣는 얘기로부터 온다. 택시를 타고 가다 기사가 “아가씨, 이거 큰 소리로 한번 읽어봐”라고 하며 건네준 “코팅된 종이 하나”와 그 종이에 쓰여져 있는 문구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그 종이에는 “순종하지 않는 년은 바로 죽인다”고 적혀 있었다. 그 대상은 그 기사의 아내이다. 김민정의 대응은 이렇다.

거스름돈 3,200원 너 다 드시고
나는 토했다
—「아내라는 이름의 아, 네」 부분

말하자면 구토로 대응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한번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택시를 탔을 때이다. “두 대의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서고 “운전석 유리창을 동시에 내”린 아저씨들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어디가냐/—집에 간다/—대낮부터 마누라 너무 조지지 말고/—해수탕 가고 없다 내 마누라 년/—그럼 디비 자라 딸딸이 졸라 쳐대지 말고/—손님 카드 긁을 힘도 없다 이 씹새끼야.” 보통은 이런 대화에 대해 말만 그렇지 집에 가면 잘한다는 말로 방어를 한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말도 조심해야 한다. 김민정에게 이런 세상은 남자가 아니라 ‘수컷’의 세상이다. 세상의 남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하나 의식은 수컷에 머물러 있다. 그 수컷들의 대화는 이들과 정말 사랑이 가능한 것일까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 있는가에 대한 의심은 시인 자신의 경험 속으로도 찾아든다. 사랑에 대한 의심은 시간대로는 이별 뒤에 찾아드는 경우가 흔하다. “사랑할 때 우리의 입은 늘 한목소리”이고 “사랑할 때 우리의 손은 늘 한 손깍지였”으나 이별하고 나면 함께 했을 때의 “벙어리장갑 한 짝”마저 돌려보내며 마음을 거두려 든다. 한때는 벙어리장갑에서도 느꼈을 사랑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는 그 현실에 대해 김민정은 이렇게 대응한다.

…이는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나 개야,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 준비하느라 오래도록 당신 참 수고하셨겠다, 죽어라 그니까 개 줄라고
—「벙어리……장갑」 부분

이별은 종종 사랑하던 순간의 모든 기억을 지우려 든다. 김민정에게는 그러한 태도가 이별이 오면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을 준비하느라 그렇게 수고한 것인가 하는 회의를 몰고 온다. 이별 앞에 그렇게 쉽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시인에겐 그것이 허무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랑은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그렇질 않다. 사랑할 때 대부분은 몸의 관계를 꿈꾸지만 몸은 사랑의 거처가 되질 못한다. 김민정이 사랑이라고 어렴풋이 느낀 것은 사랑하던 시절, 둘이 떠난 “경북 울진에서” 주운 ‘돌’에서 환기된다. 시인은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고 말한다. 혹 그런 조심스러움 속에서 돌은 달걀로 전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달걀은 병아리를 잉태할 수 있는 잠재태가 된다. 그 돌을 사이에 두고 둘 사이에 많은 추억거리가 쌓인다. 김민정에게는 그게 사랑으로 짐작이 된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부분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었다고 말했지만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돌의 쓰임새는 사실은 실용적이질 않다. 시인은 그 돌의 쓰임새를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고 말한다. 이유는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이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남자는 알 수 없는 이유를 들어 돌의 쓰임새를 만들었고 시인은 그 말을 수긍했다. 또 시인은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고 말한다. 밀폐용기이니 김이 샐 염려는 없다. 그러니 김이 나갈까 걱정이 되었다는 시인의 염려는 사실 쓸데 없는 염려이다. 시인은 필요가 없는 염려로 돌의 쓰임새를 만들었다.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어떤 명확한 이유로 나에게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존재가 가치를 갖게 되고,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필요도 없는 이유로 존재 가치를 갖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아닐까. 그렇게 순간을 충족시키다 지나가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시작되어 어느 순간, 사랑을 잉태했다 끝나고, 그러면서 가고 오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김민정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월의 바람이 있어 사랑은
사랑이 멀리 있어 슬픈 그것
—「근데 그녀는 했다」 부분

시인은 주를 통하여 이 문구가 제임스 조이스의 시집에서 가져온 문구임을 밝혀놓고 있다. 내게 이 문구는 오월의 바람이 환기시키는 것이 사랑이며, 가까이 있을 때는 온갖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하나 헤어져 멀리 갈라지면 슬픔이 되는 것이 사랑이란 말로 들렸다. 문득 사랑의 부재를 말하던 시인이 사랑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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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재를 말하던 시인이 사랑을 찾은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한편으로 그가 사랑을 찾은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김민정의 시세계를 사랑을 찾아가는 어떤 여정으로 정리한 뒤끝에서 내겐 그 점이 궁금했다. 부재의 세상이 존재의 세상으로 전환이 되었다면 분명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전환의 힘이 있었을 것이다.
내 짐작에 그것은 시였다. 김민정의 시세계에서 세상은 처음에는 사랑이 없는 세상이다. 그 부재의 세상에 대하여 시는 공격적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인은 그 세상을 시로 대치한다. 그 순간 세상이 시가 된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부분

시의 내용은 천안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노숙자와 마주하게 되었던 순간을 전하고 있다. 그 노숙자는 시인에게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라고 말한다. 시인은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아 주었으나 그는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라고 말하며 요구를 구체적으로 수정한다. 시인은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아주고 캔 커피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은 뒤 계속 열차를 기다린다. 그때 역의 전광판 속에서 여성부란 단어가 들어간 광고 문구가 지나간다. 순간 시인은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리하여 그것을 적어놓으려 다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을 찾는다.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진”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에겐 그것이 봄이기도 했다. 캔 커피가 캔 커피에 머물지 않고 봄으로 체감된 것이다. 시인에 의하면 그 체감의 순간은 여성부가 이성부로 읽힌 오독으로부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오독이 아니라 세상을 시로 채우고 싶다는 시인의 잠재 의식으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시로 세상이 채워지면 여성부가 이성부로 읽힌다.
김민정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로 세상을 채우려든다. 내겐 그가 이 폭력적이고 사랑이 부재하는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던 동력이 세상을 채운 시의 힘이었다.
가끔 텔레비젼을 본다. 김민정이라는 같은 이름의 배우가 있다. 그 이름의 배우를 볼 때가 내가 환기하게 되는 것은 시인 김민정이다. 김민정도 세상을 시인의 이름으로 채우고 있다.
(『현대시』, 2016년 5월호, 평론)

2 thoughts on “사랑을 찾아가는 어떤 여정 —김민정의 시세계

    1. 아, 산문집 갖고 계시군요. 저는 산문집은 시인이 직접 보내줘서 갖고 있습니다. 읽기는 몇 편만 읽어 봤어요. 시는 앞으로 나올 시집까지 샅샅이 읽었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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