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불을 켜지 말라 — 임후성의 시 「11월 발끝」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12월 31일 미사리 한강변에서


겨울은 추운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 물이 얼어 붙는다. 2006년 해의 마지막 날, 같이 살고 있는 그녀와 함께 미사리의 한강변에 나갔을 때, 날씨가 푸근해 얼어붙은 곳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군데군데 그런 곳이 눈에 띄었다. 물이 고인 곳에선 얼음 밑으로 물이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흘러가는 냇물에선 얼음이 조금씩 조금씩 그 물에 제 몸을 풀고 있었다. 오늘 임후성의 시 한 편을 읽다가 그때 그 냇물가의 얼음을 떠올렸다.

불을 켜려다 두고 신발을 벗는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가로등이
표구 한 글자를 밝게 알아보고 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차림 그대로 아래 앉았다
사가지고 들어온 꽃은 탁자 위에 걸쳐놓았다
마실 물 몇 잔에게 손이 왔다갔다
바닥의 잡동사니들이
발끝에서 젖고
물이 여물었다
잡동사니에서 더 들어가도록 물을 참으면
무엇이 있는 줄 모르지만
육체는 관심을 갖는다
—임후성, 「11월 발끝」 전문

시인은 어디 외출을 했다가 꽃을 사들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불을 켜려다 그대로 두었다는 얘기나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가로등 불빛으로 보아선 밤늦은 시간이 분명하다. 시인은 불도 켜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 어딘가로 앉는다. 소파 아래쪽으로 그냥 털썩 주저 앉은게 아닌가 싶다. 사가지고 온 꽃을 탁자 위에 걸쳐놓은 것으로 보아 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의 것들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아마 창문으로 흘러든 가로등 불빛이 방안의 것들을 희미하게 나마 비춰주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물을 마시려고 잔에 손을 뻗는다. 몇 잔이란 것으로 보아 여러 잔의 물을 마신 것 같다. 그 중 한 잔이나 아니면 몇 잔이 엎질러졌다. 물은 탁자를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통에 바닥의 잡동사니들이 발끝에서 물에 젖었다. 방이 얼마나 추운지 물은 곧바로 얼어붙는다. 아마 발끝에 그 감각이 전해졌나 보다.
그런데 시인은 물이 “얼었다”고 하지 않고 “여물었다”고 했다. 그 다음은 좀 헷갈린다. 시인은 “잡동사니에서 더 들어가도록 물을 참으면/무엇이 있는 줄 모르지만/육체는 관심을 갖는다”고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그 마지막 구절을 아주 평이하게 이해했다. 우선 물을 참는다는 것을 목이 마른 것을 참고 물을 마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냥 물을 치우는 것을 참는다로 보았다. 물치우는 것을 참고 그대로 있으면 물은 잡동사니를 적시고 더 흘러 다른 무엇인가를 계속 적시게 될 것이다. 방안이 어두워서 무엇이 젖게 될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이런 경우 우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물을 빨리 치워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아니, 거의 자동적으로 물을 치우려고 하는 몸의 반응이 뒤따르지 않을까. 육체의 관심이란 알고보면 물을 치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무엇인가가 더 물에 젖게 될테니 빨리 물을 치워야 한다는 몸의 반응이다.

임후성의 시를 읽으며 나는 시를 누리며 산다는게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시 <11월 발끝>은 아마도 11월의 월말에 밤늦게 집에 돌아와 물을 한 잔 마시려다 탁자 위에서 물을 엎지르고, 그것을 빨리 치워야 겠다는 생각이 든 한 순간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실은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일상을 영위해가고 있음을 교묘하게 암시한다. 밤늦게 귀가했으니 방안이 어두웠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우 거의 예외없이 곧바로 불을 켠다. 그런데 시인은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불을 켜지 않고 그냥 어둔 방에 그냥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그 순간이 시인에게선 시의 출발점을 이룬다. 우리도 누구나 그 출발점에 설 수 있다. 시인이 그 출발점에 서자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스며들 여지가 생긴다. 만약 불을 켰다면 가로등의 불빛은 방안의 불빛에 여지없이 쫓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불을 켜지 않았기 때문에 가로등의 불빛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와선 표구 속의 한 글자를 알아보고 그것을 읽어보며 방안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시를 누린다는 것은 어찌보면 상당히 간단하다. 가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불을 켜지 않고 방안으로 그대로 쓰러져 보면 된다. 그리고 방이 어두운 덕택에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 수 있게 된 가로등의 불빛을 그대로 허용하면 된다. 가로등 불빛이 비치지 않는 집이라면 달이 환하게 뜬 날 쓰러지면 된다. 앞에 높은 건물이 가로막아 달빛도 어렵다면 그런 경우엔 이 휘황한 도시의 불빛들이 거리를 방황하다 창을 넘어와 희뿌옇게 방안을 어른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에선 불을 꺼도 방안이 희뿌옇게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더도 말고 딱 요기까지만 살펴보면 시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것의 시작은 일상적 몸의 반응을 한번 멈추어 보는 것이다. 시인도 그렇게 시작하고 있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시인도 몸의 반응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시인도 물을 빨리 치워야지 하는 급한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이상, 즉 불을 켜지 않는 것 이상으로 시를 누리고 살려면 그때부터는 시인의 도움을 조금 받아야 할 것이다.
그치만 단돈 4000원이면 시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산 임후성의 시집이 4000원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시집 장삿꾼이 된 것 같다.) 이제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아마 내가 다음에 한강변에 나가면 물은 얼어있지 않고 여물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봄은 아마도 겨울 한철에 나는 얼음이란 투명한 열매가 물에 녹으면서 마치 단풍잎이 대지로 돌아가듯 물로 돌아가는 계절이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 사실은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 그러니 돈도 좋고, 더 넓은 집도 좋고, 더 큰 차도 좋지만 그와 함께 시도 좀 누리면서 살고 싶다면 가끔 불을 켜지 말고, 어둠을 방치해 보라.
(인용한 시구절은 임후성 시집,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지성사, 1997에 실려 있다.)

13 thoughts on “가끔 불을 켜지 말라 — 임후성의 시 「11월 발끝」

  1. 세탁기에서 삐삐 여덟번 울리며 세탁이 다 되었음을 알린지 수십분 지났는데도
    육체의 관심은 뒤로한채 음악에 취해 김동원님 글에 빠져있네요.^^
    와~~지금 눈이 엄청 휘날리고 있어요.^^
    이런날엔 다 귀찮아요. 운동도 때려치고 이렇게 뜨거운 커피한잔이랑 음악이랑 맘에 드는 읽을 거리가 있음 최고네요.

    1. 여기도 좀전에 정말 10m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자욱하게 날렸어요.
      이런 날 제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오늘 참 행복하네요.
      그나저나 컴퓨터의 그래픽 카드가 망가져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카드라 살 수도 없고…

    2. 상당수의 사람들이 티스토리로 가는 군요.
      저처럼 독립적인 주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을 하기엔 과정이 너무 복잡한 것 같아요.
      어디로 옮기긴 옮겨야 하겠는데…

  2. 예전에.. 거의 20년도 더 된 것 같으네…
    그때 내가 생맥주 가격이랑 시집 가격이 같다는 걸 알았지…
    그때 생맥주 가격이 2,500원 이었는데 시집 가격도 똑같았어.
    그날 내가 생맥주 한 잔을 마시지 않고 시집을 사고는
    시집 앞에다 생맥주랑 바꾼 시집이라는 글을 적어뒀더라…ㅎㅎ

    아침에 눈보라처럼 눈이 날리더라. 참 예쁘게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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