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담쟁이 덩쿨의 삶은 고달퍼.
깎아지른 담벼락을 여기저기 더듬어
우리 눈엔 보이지도 않는 실낱같은 틈을 겨우 찾아내고
그 작은 틈을 부여잡고 삶을 이어가야 하다니.
아마도 그 삶은 항상 허공을 붙들고 있는 듯한 느낌일 거야.
그러니 삶이 얼마나 힘겹고 옹색하겠어.
그러고 보면 삶이란 참 질긴 거야.
그 깎아지른 담벼락에서도 삶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말야.
하지만 담벼락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담쟁이 덩쿨을 보면
나는 문득문득 담쟁이가 하루에 열두번도 더 손을 놓고 싶지 않을까 싶어.
나는 절대로 담쟁이 덩쿨로는 태어나지 않을테야.
록 클라이머(rock climber, 암벽 등반가):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담쟁이 덩쿨로 태어날테야.
담벼락이 수직으로 길을 막으면
아무도 더이상 앞을 나갈 수 없지만
담쟁이 덩쿨 앞에 그런 벽이란 세상에 없어.
담쟁이 덩쿨은 더듬더듬 몇번 손을 뻗으면
그 끝에서 빈틈을 감지해내는 타고난 본능을 갖고 있지.
담쟁이 덩쿨이 그 빈틈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그때부터 담벼락은 길을 막는 수직의 벽이 아니라
그냥 평지의 길과 똑같은 길이 되어버리지.
담쟁이 덩쿨에겐 세상의 모든 벽을 길로 만드는 타고난 길의 본능이 있어.
담쟁이 덩쿨의 앞에 가로막힌 길이란 없는 거지.
난 가끔 벽이 수직으로 서 있는게 아니라
담쟁이 덩쿨이 벽을 감싸서
벽이 겨우 수직을 유지하며 서 있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곤 해.
담쟁이 덩쿨이 벽을 기어오르는게 아니라
벽을 수직으로 붙잡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지.
그래서 벽에서 담쟁이 덩쿨을 걷어내면
얼마가지 않아서 벽에서 버려진 폐가의 냄새가 날 것 같아.
폐가란 것이 그렇잖아.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얼마 못버티고 무너져 버리는 거 같아.
그러고 보면 집을 지탱하는 건 그 속에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들거든.
그래서인지 담쟁이 덩쿨을 걷어내면
그 꼿꼿하던 담벼락도 수직을 버리고 곧 무너질 것만 같아.
마치 버려진 폐가가 금방 무너지듯이.
록 클라이머의 가장 큰 꿈이란
깎아지른 암벽을 오르는게 아니라
마치 그 암벽의 꼿꼿한 수직을
자신이 붙들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에 이르는 것일 거야.
바로 담쟁이 덩쿨이 그걸 보여주지.
수직의 담벼락에 삶의 둥지를 틀고 살고 있으니 말이야.
오늘도 내일도 암벽을 오르는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담쟁이 덩쿨로 태어나고 싶어.
사람들이 그냥 사는게 아니라 집을 지탱하며 살듯,
깎아지른 절벽의 꼿꼿한 수직을 내가 붙들어주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5 thoughts on “벽과 담쟁이 덩쿨”
김동원 샘~~메일 다시 보냈어요..
잘 받았어요.
정리해놓은 나머지 시들은 선물 받은 기분이예요.
처음 본 느낌은 말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그럼 내 조카는 담쟁이 덩쿨^^
아마도… 전생에 그렇지 않았을까.
그런데 전생에 식물성이었다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