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안개의 하얀 나라 1 – 평창 선자령

3월 17일 토요일, 라디오에서 대설주의보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듣고 내게 전했다.
인터넷에서 인제 군청을 찾아 무작정 전화를 하고 눈소식을 물었더니
거긴 눈이 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다음에 전화를 한 곳은 오대산 국립공원이었다.
거기도 눈이 없다고 했다.
대신 전화를 받은 여자분은 강원도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강릉은 눈이 엄청왔다고 하데요”라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이미 마음은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고,
‘급한 일’이 있지 않냐며 그 마음을 다시 집안으로 들여놓으려 했지만
바깥으로 나선 마음은 전혀 고개를 돌릴 태세가 아니었다.
결국 그녀와 함께 강원도의 대관령을 향하여 길을 나서고 말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서울에서 출발한 것이 아침 10시경.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목으로 가고 있을 때
옆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서울은 눈은 커녕 잔설도 보이질 않는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넓은 것일까.
정말 여긴 이렇게 햇볕이 화창한데 강원도엔 눈이 내리고 있을까.

Photo by Kim Dong Won

우리는 중부고속도로로 올라탔다.
1시간을 달리고 나서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여전히 눈은 없었다.
조금 가다보니 비까지 뿌린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가 평창 가까이 가면서 엷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까운 곳엔 눈이 없어도 멀리 산봉우리엔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Photo by Kim Dong Won

진부까지도 없던 눈이
횡계로 들어서자 길가로도 완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은 횡계에만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드디어 대관령에 도착했다.
대관령은 하얀 눈의 세상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2시간 20분을 달린 끝에 우리는 눈의 나라에 도착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어느 한해 대설주의보 소식만 들리면
강원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적이 있었다.
올해는 강원도 쪽으로 대설주의보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다 강원도로 나서도
눈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멀찌감치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발목이 빠지는 눈을 지천으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눈의 세상은 경험하질 못했다.
그런데 대관령엔 어디나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눈의 세상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대관령에 차를 세워놓고
옛날의 영동고속도로를 건너 선자령으로 오른다.
조금 오르다 보니 차를 세워놓은 대관령 휴게소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서서 내려다 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오는 봄을 누가 막으랴.
봄은 수많은 꽃과 신록을 불러다 준다.
하지만 그 계절에 눈의 자리는 없다.
그러니 눈은 이제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떠나는 눈은 슬프다.
눈은 떠나기 싫다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지끝에 떠나기 싫은 눈의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초록을 사시사철 입고 사는 나무도
오늘은 자신의 색을 버리고 하얗게 차려입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선자령은 중간까지 콘크리트 길이 닦여있다.
편하긴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콘크리트의 삭막함 때문에
산을 오를 때는 그런 길을 싫어한다.
오늘은 그 길의 삭막함을 눈이 하얗게 덮어주었다.
그러나 눈이 오긴 했지만 날은 봄날이다.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았으며
때문에 길에선 벌써 군데군데 눈이 녹아 벗겨진 곳들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눈은 점점 더 풍요로와 진다.
산의 사면에서 작은 관목들이 가지를 모두 눈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또 저 나무들은 눈의 추억을 털어내고
그 가지끝에서 새싹을 키워 봄을 준비하느라 바빠질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조금 더 올라가자
길을 덮은 눈이 점점 더 두터워진다.
때마침 하늘이 벗겨지면서 해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눈에 햇볕이 부서지면 그때는 눈이 부신다.

Photo by Kim Dong Won

눈은 그러고 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빛의 세례인지도 모른다.
빛은 매일 사람들에게 축복의 세례를 보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것의 투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빛이 쏟아질 때 빛을 보기 보다 빛이 비추는 세상에 눈길을 빼았긴다.
그래서 빛은 가끔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덮어
자신이 매일 그렇게 축복처럼
세상 모두의 머리 위에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늘에서 빛이 환했고,
나무들이 그 빛의 세례를 하얗게 뒤집어 쓰고 있었다.

12 thoughts on “눈과 안개의 하얀 나라 1 – 평창 선자령

  1. 이왕 기기가 편리해질려면 좋은공기라던가 솔향기하던가 코찡한 눈밭의 바람이던가 이런것도 사진을 보면 느낄 수 있게 해주면 더 좋겠어요~
    -_-

    1. 여행하면서 깨닫는 건데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구속에서 풀려난 자유와 그 자유의 힘으로 불편의 행복에 눈뜨게 된다는 것 같아요.
      밤기차타고 내려갔던 순천과 순천만을 끝도 없이 걷던 순간들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그렇고, 버스타고 내려가 한계령에서 설악산을 걷고 걸어서 대청봉까지 갈 때가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선자령 눈풍경이나 그곳의 공기보다는 아픈 다리를 끌고 절뚝거리면서 정상에 올라갈 때의 그 느낌이 가장 좋죠. 저는 이 날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곳을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냥 좋은 사진을 얻는다는 것보다 아무 곳이나 걸어다닐 수 있는 그 자유가 좋았어요. 그냥 그러다 죽고 싶을 정도로. 눈이나 바다는 좀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이 되는 것 같아요.

  2. 이 겨울엔 이스트맨님과 포레스트님 덕분에 눈구경했습니다.
    실로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 제대로 밟아본 건 두 번 정도에요.
    대신 비는 지겹게 보았네요.ㅡㅡ’
    눈이 없는 겨울은 반쪽짜리 겨울…

    1. 후유증: 갔다와서 일에 마구 쫓기고 있어요.
      월말까지 마쳐주겠다고 약속했는데 2주밖에 안남았어요.
      내려가던 날, 선자령 꼭대기서 전화받았어요.
      지금 급한 일 하나 있다는.
      밤 10쯤 올라간다고 했더니 올라오자 마자 해달라고 해서
      밤 12시에 끄덕끄덕 졸면서 해주고 자야 했어요.
      그래도 내려가면서 쓴 기름값은 다 뽑았어요.
      핸펀과 인터넷의 시대는 골치아퍼요.

    2. 올라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맥북 하나 있으면 올라가면서 차 속에서 사진 정리하면서 가면 될텐데…
      근데 한편으로 생각하니 올라가는 길이나 내려가는 길도 여행의 하나인데 그렇게까지 하면 여행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현대적 기기들이 너무 편리해서 탈이예요.
      사실 차없었으면 이번처럼 충동적으로 여행가기가 아주 어렵거든요.
      이제 핸펀과 컴퓨터는 그거 없이는 살기 어려워진 거 같아요.
      근데 가장 행복했던 여행은 버스타고 아주 불편하게 갔던 영주 부석사나 강원도의 백담사, 설악산 여행이었다는 게 참 이상해요.
      다음엔 가급적 버스를 타고 떠나야 겠어요.
      일단 일 마쳐놓고 좀 여유로울 때.
      눈 이외의 경우엔 좀 충동을 자제할 수 있을 거예요.
      눈은 그게 안되요.

  3. 우리나라 땅 참 좁다고 생각하는데 어쩜 그렇게 날씨가 다르냐…
    그래도 그날은 눈은 많이 왔어도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따뜻한 날씨여서 좋았어.

    1. 서울은 화창하고
      여주쯤 지날 때는 비온 것 같구
      그 다음엔 또 눈발이 간간히 날리고
      온갖 날씨를 하루에 다 경험했네.
      바람이 역시 봄은 봄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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