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바다의 기억이 흐릿해 집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요.
설악산의 대청봉에 올랐을 때의 느낌이야
우리의 작은 몸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벅차지만
그런 느낌도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벌써 약간씩 바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사시사철 산이나 바다를 끼고 사는 것도 그럴 것 같습니다.
너무 자주보면 그때는 감각이 무뎌지니까요.
감각이 무뎌지면 가까이 있어도 지워져 있는 것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참, 세상 산다는 게 그렇습니다.
멀어지면 흐릿해지고, 곁에 두면 무뎌지니까요.
이달 초, 속초의 설악해수욕장에 갔을 때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하나 보았습니다.
속살은 누구에겐가 다 내주고
껍질만으로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아주 좋은 곳에 자리를 잘 잡고 있었습니다.
가끔 바닷물이 조개가 있는 자리까지 밀고 올라와선
조개를 바닷물로 적셔주고 있었으니까요.
바닷물은 보폭이 일정치를 않아
올 때마다 들고나는게 들쭉날쭉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그 걸음이 조개가 있는 곳에서 턱없이 모자라
헛물을 켜도 한참 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들쭉날쭉한 거리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 말을 할 듯 말 듯 주저주저하는 수줍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몸을 길게 뻗어
순식간에 조개가 있는 곳까지 밀고 올라왔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밀고 올라와선 무슨 말인가를 남겨놓고
줄행랑을 놓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면 이제 막 햇볕에 등을 말리려고 하던 조개껍질은
온통 바닷물을 뒤집어 쓰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닷물에 젖은 조개껍질에서
바다의 기억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바닷물 속에 몸을 담고,
사시사철 젖어있을 때
조개에게 저런 선명한 바다가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바다가 무뎌지고
너무 멀리 있으면 바다가 흐릿해 지지만
가끔 밀려와 온몸을 적시는 바다는
그때마다 더욱 선명해지곤 했습니다.
4 thoughts on “바다와 조개껍질”
바다는 좀 시끄러운 아이고,
조개는 얘기를 잘 들어주는 아이야.
둘은 아주 짤떡 궁합이라고 할 수 있지.^^
것도 재미나네.
바다와 조개의 대화라.
一當百!!!
파도에 맞서는 늠름한 조개장군의 모습! 🙂
난 백을 흰백으로 슬쩍 바꿔 읽었어요.
흰파도라서.
오, 아주 좋은 착상이예요.
다음에 바다에 갔을 때 요런 사진을 하나 더 찍어서
왜 푸른 바다가 흰색의 파도가 되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겠어요.
그러고보니 조개는 대개 흰색이네요.
바다가 조개의 색을 갖고 싶어서 흰색으로 부서진 동화를 엮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기억해 두었다가 써먹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