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쓸 일이 있어서 월요일(11월 28일)에 암사동의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정기적으로 쉬는 날이었다.
다음 날 오후에 다시 문을 나섰을 때는 가늘게 빗발이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챙겨 들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처음 천호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 80년이니까 아득한 옛시절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처음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나 지금이나
암사동의 선사유적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옆의 현대적인 아파트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기가 서울인가 싶게 시골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느 해 여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그대로이다.
가끔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곳에서 가을의 색을 들여다 보았다.
초록도 분명한 색이지만
그러나 단풍의 계절이 오면 초록은 색이 아니다.
형형색색이라고 했을 때 가을이 펼치는 그 화려한 색의 대열에서
초록의 자리는 이제 없다.
하지만 가을이 와도 많은 수의 나무들이 초록을 고집한다.
버드나무도 그 중의 하나이다.
때문에 버드나무가 떨군 이파리의 길은 바래긴 했어도 여전히 초록의 길이다.
여름의 기억이 오랠수록 나무는 초록을 버리지 못한다.
버드나무의 여름 추억은 마지막까지 초록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가을 낙엽에서 우리는 가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름의 추억을 함께 볼 수 있다.
가을은 형형색색이나 갈색으로 뒹굴며
여름 추억은 초록빛 그대로 말라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 색의 가을에 깃든 것도 여름 추억일지 모른다.
여름에 우리는 싱그러운 초록빛이었지만
그때의 타는 열정은 분명 붉은 빛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붉은 빛의 가을 또한 우리의 여름 추억이 분명하다.
젊은 날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 있어도
반짝반짝 눈에 띄었지.
갈색으로 오그라든 낙엽들 속에서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제 경계를 빛내는 단풍잎처럼.
그렇게 본다면 노란 단풍도 사실은 여름 추억의 힘으로 영근 빛깔이다.
낙엽과 단풍을 돌아보던 내 눈에 오래 전에 잘려진 나뭇가지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가지치기의 흔적이리라.
제 팔을 잘라 보낼 때 가지는 아팠겠지.
하지만 나는 잘라진 그 흔적을 언듯 보았을 때는 꽃과 혼동했다.
상처는 아물어 꽃처럼 영글 수도 있다.
색은 단풍잎에만 깃들지 않는다.
열매에도 색이 있다.
열매는 가을에야 저토록 고운 빨강을 갖는다.
가을은 열매에게 저무는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다.
열매의 색은 단풍잎에 비해 훨씬 다양해서
어떤 것은 검정빛 채색으로 가을을 보낸다.
하지만 검정빛의 열매도 속을 열어보면
순백의 희디흰 속살이나 붉은 색을 잔뜩 움켜쥐고 있을 것만 같다.
색은 원래 단풍의 것이 아니라 꽃의 것이다.
그러나 꽃은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를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그저 날의 따뜻함으로 분별할 뿐이란 것이다.
겨울 초입의 날씨가 며칠간 푸근하다 싶으면
벌써 봄으로 착각하여 몽우리를 잡고 색을 내민다.
그러므로 꽃의 색을 유혹하고 싶다면
일단 먼저 꽃을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이라 해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꽃은 핀다.
나는 갑옷처럼 단단하게 움켜쥔 열매 속에서
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갈 비상의 꿈을 엿보았다.
그 꿈은 순백의 흰색이었다.
꽃은 색으로 피어나지만
단풍잎은 색으로 영근다.
그래서 꽃은 젊음의 색이고
단풍은 노년의 색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그 색이 곱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처럼 빚어낸 빛깔이기 때문이다.
피어난 색깔은 주어진 색깔이지만
빚어낸 색은 내 삶의 무게가 얹힌 나의 색이다.
가을의 대화는 색의 대화이다.
그 색의 대화는 아울러 삶의 대화이다.
살아온 세월이 깊어지면 우리 또한 색의 대화를 누릴 수 있다.
가을이 지나면 색마저 바랜다.
갈색은 색이 빠져나간 자리의 텅빈 색깔이다.
나는 그 텅빈 색깔의 가을을 한참 동안 부여잡고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나뭇가지도 내 맘 같았는지
바싹 마른 갈색의 나뭇잎을 부여잡고
바람이 이리저리 흔들며 손을 벌려도
여간해선 내놓질 않았다.
발밑에선 밟힌 낙옆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낙엽의 소리로 덮여있었고,
나뭇가지에 걸린 빛바랜 낙엽 하나는 색을 잃고 나면
소리로 세상을 덮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젊음이 가고 나면 색을 잃지만
세상에 들려줄 얘기 거리를 얻는다.
나는 늙으면 젊은 사람들이 나를 밟고갈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의 소리로 입을 여는 가을이 될거다.
14 thoughts on “가을의 색은 여름의 추억이다 –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통통이님 말씀에 웃음이나요.^^
저도 저 빨갛고 쪼개진 열매 사진을 보면서 저 열매는 무지
작은 열매인데 덩치가 큰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작은 열매를 지나치지않고 찍었을까..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정말 김동원님은 그 어떤 사물에도 시를 쓸수있는 놀라운 분이신거같아요.^^
전 맨밑의 사진같은 가을빛이 참 좋더라구요.
예전에 홈페이지 시절엔 저런색으로 메인을 도배했었는데.^^
블로그에서나 겨우 제가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보통은 글이란게 다 제 형식을 갖고 있어서 시는 시의 틀에, 소설은 소설의 틀에 갇혀서 써야 하거든요. 블로그는 그냥 아무렇게나 끄적거릴 수 있어서 그게 좋아요. 나의 자유로운 세상이죠.
잘려진 나뭇가지… 사진이 아주 인상적이예요.
“상처는 아물어 꽃처럼 영글 수도 있다.”는 말이 꽂힙니다.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세요.
그 풍부한 감수성 때문에 때론 피곤하지 않으실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크~ ^^
사진은 전혀 피곤하질 않죠.
왜냐하면 그건 일이 아니니까.
지금은 사진을 일로 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상당히 피곤하더군요.
일은 남에게 맞추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냥 취미로 사진찍을 때는 내 멋대로 하니까.
내 멋대로 하면서 돈도 좀 벌 수 있는 일은 없을까나…
내 멋대로 뭔가를 한다는건 내 감수성이나 감정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것이니 피곤할 리 없겠네요.
전 때론 풍부하지도 않은 제 감수성 때문에 간혹 피곤할때가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해본거랍니다.
내 멋대로 하면서 돈 벌 수 있는 일… 글쎄요.
저도 그걸 찾고 있어요.
블로그의 제일 좋은 점 –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란 점.
그 중에서도 태터는 더더욱 좋죠.
전혀 어디에 귀속되어 있질 않으니.
그러면서 사람들과 소중한 인연도 쌓아가고…
우리 언제, 인건, 로스케, 카멘, 이렇게 해서 올림픽 공원쯤에서 한번 모입시다.
아키님 한테 너무 먼가?
근데 화정동이 어디예요?
헉.. 너무 멀어요.
화정동은 일산쪽에 있거든요.
함 뵙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으~~
으, 너무 멀다.
인건님은 가까이 있어서 벌써 두 번이나 봤는데…
살다보면 기회가 생기겠지요, 뭐.
그래도 모이실때 연락함 주세요.
상황이 가능하면 원거리 출장 시도해볼께요.
제 연락처 019-393-7318입니다.
알겠습니다.
역시 Eastman님의 사진은 Eastman님의 글과 함께 숨을 쉬기 시작하고 완성되는 듯…
언제 로스케, Camenzind, 모두 모여보지요.
둔촌동에 분위기 좋은 오뎅집이 하나 있더군요.
제가 옆에서 사진 찍는 걸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그다지 사진찍을만한 좋은 풍경이 아닌 곳에다 파인더를 들이밀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것이 어떻게 사진이 되나… 그러면 떡허니 사진과 글이 만들어져요.
울 털보는 사진을 찍을 때 텍스트가 떠오르는 건지
사진을 찍어다 텍스트를 갖다 붙이는 건지
참 요상하고 신기해요^^
뭐야, 이거, 찬사를 보내려면 확실하게 보내든가.
이번 사진에서 잘려진 나뭇가지, 철쭉의 꽃봉오리, 버드나무 이파리의 낙엽, 단풍 두 잎의 사진은 찍을 때 머리 속에서 텍스트가 지나갔고, 나머지는 나중에 사진 정리하면서 머리 속에서 텍스트가 생각난 경우. 특히 마지막 사진의 문구는 서너 번 이리고치고 저리고치다가 최종 글귀에 이르렀다. 이런 경우엔 쓸쓸하다는 느낌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좀 생각을 뒤척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느낌을 넘어서는게 나의 즐거움이자 재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