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감옥

Photo by Kim Dong Won
2022년 6월 28일 서울 한강변에서

비가 내리고 나는 비에 갇혔다.
내가 비를 피한 곳엔 천막이 쏟아지는 비를 막고 있었고,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걷다가 들어가면 햇볕을 막아주며 아픈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주던 곳이었다. 나는 잠시 그곳의 벤치에 앉아 아픈 다리를 쭉펴고 휴식의 시간으로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온 나의 노고를 달래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비를 피해 그곳으로 들자 우산없이 집을 나온 내게 그곳은 이제 나를 가둔 감옥이 되었다.
시간은 밤이 늦어 감옥 앞의 가로등이 환했고, 가로등의 빛은 빗줄기의 굵기를 확연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 감옥 앞에서 빗줄기는 촘촘한 창살이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음을 때로는 굵은 창살로, 때로는 가는 창살로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수감 생활이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이 비가 그칠 것이며, 비가 그치면 감옥도 흔적없이 깨끗이 사라지리란 것을. 그러니 나는 끈질기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비의 감옥이 내게 환기시키는 것은 비가 그칠 것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비의 감옥에 갇혔을 때마다 내가 겪었던 마법 같은 옛기억이다.
그 마법은 핸드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손에 전화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열린 뒤로 나에게는 비의 감옥에 갇히기만 하면 전화를 걸던 여자가 있었다. 전화를 걸면 그녀는 어김없이 우산을 들고 나의 감옥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비의 감옥을 비웃으며 곧바로 그 감옥을 탈출했다. 그녀가 들고온 우산의 마력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우산의 마력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내게 그것은 그녀의 마력이었다.
감옥은 탈옥범과 탈옥을 도운 여자를 눈앞에서 빤히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비가 많은 여름철엔 느닷없는 투옥이 곧잘 벌어지곤 했지만 나는 한번도 비의 감옥에서 대책없이 석방의 시간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나를 감옥에서 꺼내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이상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감옥을 나가 비의 창살을 모두 감내하며 탈옥을 감행한 것도 아니다. 한때 나는 그런 과감한 탈옥을 감행한 적이 몇 번 있었으나 내가 비에 젖은 탈옥이라 불렀던 그러한 탈옥은 나를 물에 빠진 생쥐로 만들어버리는 돌연변이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번 생쥐가 되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곤 했다. 나는 그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곧장 비를 맞으며 탈옥을 감행했던 몇 번의 경우를 떠올렸다. 모골이 송연해진 순간이었다. 물론 다 헛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돌고 난 뒤로 쏟아지는 소나기 앞에서 그럼 네가 빗속으로 한번 뛰어들어 보시던지라는 비아냥을 정면으로 맞서며 빗줄기를 감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내가 감행했던 몇 번의 비에 젖은 탈옥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쥐로 변하지 않은 것은 그때마다 우연하게 쓰고 있었던 모자 때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더 이상 내게 비에 젖은 탈옥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원히 비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은 아니다. 비는 언제나 그쳤고, 그러면 감옥은 감쪽같이 지워졌다.
오늘도 비가 내리고 나는 비의 감옥에 갇혔다. 하늘을 살펴 비가 올지 짐작하거나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짐작을 대신하며 대비를 해왔던 나는 오늘은 우산없이 집을 나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집을 벗어나고 길고 오래 걸었다. 그러다 비를 만났고, 비에 갇혔다.
요즘의 여느 때처럼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의 창살을 바라보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마법 같은 탈옥이 이루어지던 오래 전의 아득한 옛날이 그 빗줄기에 중첩되었다.
그런데 오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전화를 받자 그녀가 물었다.
“어디야?”
나는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알 것 없잖아.”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뭔 소리야, 비가 오고 있는데. 어딘지 빨리 말해. 말안하면 네가 갈만한 곳을 짐작하며 이 밤에 내가 온갖 곳을 다 쏘다닐거다.”
뭔가 좀 이상했다. 나는 그녀가 요즘의 그녀답질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일러주고 있었다. 집에서 오려면 좀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빗줄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 빗줄기 속에서 그녀가 저만치 나타났다.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오고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30년전의 그녀였다. 얼굴의 피부는 어린 티가 역력했고, 몸을 호빵처럼 감싸고 있던 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연유를 알 수 없는 나는 말문이 막힌채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보더니 곧바로 물었다.
“어,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늙었어. 30년은 늙은 사람 같아.”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우리는 둘 모두 자신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30년 동안 너를 기다린 모양이지, 뭐.”
그녀가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냐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우산을 같이 쓰고 비의 감옥을 탈출했다. 오랫만에 걷는 아득한 옛날이었다. 빗속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2 thoughts on “비의 감옥

  1. 그녀의 사랑은 변허지 않았고 여전히 구원자로 오시는군요.
    행복을 엿보고 갑니다.
    저도 비의 감옥에 갇혀 누군가 탈출시켜 줄 사람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수 없이 올라오는 문자들을 해독하는 동안 감옥의 문이 열릴 것 같습니다만.

    1. 소설을 쓰는 이유가 상실해버린 사랑을 소설의 이야기로 메워보려는 생각도 있는 듯 싶어요. 몇 시간 동안 비를 보며 핸드폰에 메모해서 초안을 잡았는데 괜찮은 방법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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