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벌써 토요일(12월 3일) 저녁부터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밤에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눈소식을 알려줄 정도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 마당에서 눈을 찍겠다고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남한산성 정도의 가까운 곳으로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어제(12월 4일) 아침 카메라를 둘러메고 마당을 나선 나는
마당에 쌓인 눈이 양에 차질 않아 그 길로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여러 곳의 행선지를 훑어보았지만 8시 30분의 늦은 시간에는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만만하게 눈에 띄질 않았다.
결국 몇 분간의 황망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지명을 훑어본 끝에 내가 골라잡은 곳은 원주였다.
원주가는 표를 한장 달라고 할 때 내 머리 속엔 치악산이 있었다.
나뭇잎들은 한해내내 초록으로 살다가
가을이 오면 색을 뒤집어 쓴다.
그러다 겨울엔 그 색 위에 순백의 눈을 뒤집어쓴다.
색이 없다면 가을이 가을이 아니며,
눈이 없다면 겨울도 겨울이 아니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자
가지에 얹혀있던 눈들이 바람을 타고 하얗게 비상했다.
그러자 바로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빛이 하얀 눈가루의 비상을 타고
가지사이로 깊숙히 줄기를 뻗었다.
그렇게 나무줄기는 하늘로 뻗고
빛의 줄기는 나무들 사이로 뻗는다.
눈이 하얗게 치장을 해주면
나뭇가지에 내리는 빛이 더욱 쨍한 느낌이 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영락없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눈이 내릴 때마다 숲은 완벽하게 축제를 준비하는 셈이다.
그러니 눈이 내릴 때는 그저 축제의 흥겨운 마음으로 그 곳을 거닐기만 하면 된다.
숲이 이미 나머지 준비는 모두 갖추어 놓고 있으니까.
바람이 가지를 거세게 흔들자
나무는 계곡의 저 위쪽에서 하얗게 수직으로 하강하는
눈가루 폭포를 만든다.
원래 이 길은 황토빛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낙엽이 깔렸을 때는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산을 오르는 우리의 걸음과 함께 한다.
그러던 길이 오늘은 순백의 길로 하얗게 바뀌었다.
뽀드득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내내 우리를 따라온다.
지금 바람은 눈가루를 데리고 잠시 숲을 비행 중이다.
바람이 저 혼자 다닐 때는 숲이 투명하지만
눈가루와 동행하면 숲엔 엷은 반투명의 흰색 채색이 얹혀진다.
한 아버지가 아이를 목말태우고 산을 내려온다.
아마도 아버지는 산의 꼭대기에 올라
아이에게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넓은 가슴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 아이는 깨닫게 될 것이다.
산을 오를 때마다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그때마다 가슴이 뿌듯해지는 그 신비로운 느낌의 실체가
사실은 어릴 적 자신을 업고
산의 정상에 올랐던 아버지의 높고 지순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는 계단을 오르다 난간을 부여잡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산에 올 때마다 깨닫는 것이지만
산을 오를 때는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럴 리야 있겠냐만
숨을 헉헉 몰아쉴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쉬는 숨이 족히 들이쉬는 숨의 다섯 배는 넘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산을 오르다 계단의 난간을 부여잡고 헉헉 숨을 내쉰다.
지상에 있을 때 나는 혹 내쉬는 것은 잊어버리고
계속 들이쉬기만 한 것은 아닐까.
산에 와선 지상에서 들이쉬었던 그 모든 숨을 다 내뱉고 가는게 아닐까.
숨이 잔잔해질 때쯤 계단을 올려다보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계단의 양옆으로 눈이 거리 양옆의 인파처럼 늘어서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발을 옮겨놓자
눈이 하얗게 박수를 쳐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구룡사에서 세렴폭포, 사다리 병창을 지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내려올 때는 입석대쪽으로 내려왔다.
지금까지 올라간 산들은 중간중간 경관이 트이는데
치악산은 그런 곳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나무들 사이로 경관을 엿보아야 했다.
눈들이 산의 여기저기서 하얗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소나무 이파리는 뾰족뾰족하다.
그러나 눈이 내리면 그 뾰족뾰족한 이파리도 잠시 둥글둥글해진다.
사람들이 줄지어 산을 내려온다.
산은 호젓하게 홀로 오르는 것도 맛이지만
이렇게 줄서서 함께 가는 맛도 남다르다.
눈이 내리면 산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수묵화는 사실은 세상의 눈내린 풍경이다.
치악산 정상에 있는 돌탑.
모두 3개의 돌탑이 있다.
돌탑의 바로 옆에 있는 비석은 이곳이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임을 알리는 표지이다.
누군가 개인이 전국의 돌을 주워모아 10년 세월에 걸쳐 이 돌탑을 쌓았다고 들었다.
항상 굴러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정상으로 밀고 올라가야 했던 시지프스가 생각났다.
까뮈의 시지프스는 그렇게 이룰 수 없는 신의 징벌을
돌을 산에 올려놓았을 때의 성취감으로 반전시키며
가치없어 보이는 일을 가치로 뒤바꾸어 놓았지만
한국의 시지프스는 돌을 잘만 갖고 올라가서 쌓기 시작하면
그 성취감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누적된다는 사실을 깨달은게 아니었을까.
신의 징벌을 더더욱 근본적으로 뒤흔든 놀라운 시지프스가
바로 한국에 있었는가 보다.
(오래 전에 치악산을 오른 경험이 있는 그녀는
당시엔 돌탑이 아주 작았다고 한다.
이 돌탑은 낙뢰를 맞아 무너졌었는데
원주시에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높은 곳에 주거지를 갖는 사람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오르내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평지에 살면 일상은 편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상에 묻힐 때 높이를 잃는다.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잃었던 높이를 얻는다.
평지의 일상과 달리
높이 오르면 멀리, 넓게 볼 수 있다.
멀리 넓게 본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까이 세밀하게 보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삶이란게 균형이 중요한게 아닐까 싶다.
산에 오르면 평지의 일상에 살면서
항상 가까운 곳에 몰렸던 우리의 시선이
잠시 넓고 먼 시각을 얻게 되고
그러면서 균형을 찾게 되는게 아닌가 싶다.
산에 올라 멀리 넓게 보며
잠시나마 가까운 곳에 막히거나 항상 올려보기만 했던 시선을
구름까지 내려보냈다.
지상을 살면서 답답하고 힘들 때는 한번 산에 갈 일이다.
산의 정상이 주는 그 아득한 높이와 그 높이가 주는 풍경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실 평지에서 서서 살고 있다기 보다 엎드려 살고 있는 셈이다.
엎드려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일상이 힘들고 답답하다.
산에 오르면 서서 살 때의 균형잡힌 자세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로운 느낌을 얻어올 수 있다.
그러니 답답하고 힘들 때는 조금 높은 산을 택하여 한번 산에 올라 보시라.
10 thoughts on “눈내린 치악산을 오르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자락에 위치한 맛집강추^^시내에서 15분거리구요~
http://oriday.hompy.us
황골가든 033)731-9298 한우숯불구이 오리불고기 인삼곰탕&돌산갓김치
치악산은 아마 ’94년 겨울엔가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악”자가 있는 값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답답할 때는 … 한번 산에 올라보시라”, 참 마음에 듭니다. 애들이 크면 애들과 함께 눈덮인 산을 오르고 싶습니다.
산에 있어서 만큼은 저의 대선배인듯 합니다.
저는 올해 처음으로 설악산, 월악산, 치악산을 올랐습니다.
*^^*네 검단산과 한강 때문에 하남시를 못떠나고 있습니다
영,육간에 건강 균형잃지만 마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드려요. 걱정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제가 살아요.
아주 가까운데 사시는 군요.
올때마다 감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넉넉하니 나눠주시는 마음하고 사진이 ..그리고 글들이
답답한 가슴을 트이게 해주시네요..
잘쉬고 위로 받고 갑니다.주말엔 집앞 검단산에나 올라봐야 겠어요^^
검단산이면 하남시에 사시는가 보네요.
저는 천호동에 살아요. 검단산은 세 번 정도 올라가 봤네요.
일해야 하는데 놀러갔다 와서 걱정이네요. 뭐, 어쩌겠어요. 바짝 조여서 일하는 수밖에.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무지 추웠을텐데 정상까지 오르시고.^^
덕분에 가슴 시원한 사진 구경하고 가네요.^^
항상 이럴 때마다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가 바로 그 얘기예요. 그녀가 언제나 하는 얘기죠.
사실 너무 추워서 얼어죽는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