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라는 것이 있다. 대체불가능토큰이라고 불린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디지털 예술작품이 원본이란 것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디지털 예술 작품은 원본과 복사품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판매를 한 작품이 복사되어 퍼저 나가면 어떤 것이 원본인지 알 수가 없어지게 된다. NFT는 말하자면 복사에 취약한 이런 디지털 작품에 첨부하여 해당 파일의 작품이 원본임을 보증해준다.
코로나 백신 접종율이 80퍼센트에 달하면서 방역이 완화되고 공연이 다시 재개 되었다. 홍대의 스트레인지 푸릇에서 공연을 보게 되었다. 공연자들이 2년만에 리얼 피플을 눈앞에 놓고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방역 때문에 영상으로 만날 때도 사실은 진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올해 인천에서 열린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유튜브로 봤었다. 그런데 보면서도 음악은 있지만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왜 사람이 없었겠는가. 수많은 락 매니아들이 유튜브를 통해 현장에서의 중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현장에 없는 우리들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스트레인지 푸릇의 무대에 선 공연자들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눈앞에서 대면할 때 비로소 진짜 사람이었다. 왜 우리는 서로 직접 만났을 때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일까.
리얼 피플이란 그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우리들에게는 직접적인 대면 접촉이 아니고는 느낄 수가 없는 NFT가 우리들에게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우리 몸에 내장된 그 대체불가능토큰은 유튜브에서 디지털 영상을 통해선 느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날 맨 앞줄에 앉았던 나는 소리꾼 김소진의 노래를 마치 내 몸으로 모두 감당하듯이 보고 들었다. 그것은 김소진의 영상으로는 아무리 영상을 가까이서 봐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몸이란 김소진의 노래를 진짜로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NFT를 갖춘 영상도 전하지 못하는 진짜 김소진의 노래였다.
NFT는 혼란을 부른다. 마치 예술 작품의 가치가 작품의 소유에 있는 듯한 착각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작품은 원본과 복사품이 똑같다. NFT를 첨부했다고 해도 디지털 작품은 원복과 복사품이 달라지진 않는다. 다만 원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뿐이다. 소유는 가치를 갖는 일이 아니다. 가치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만 가진다. 그리고 가치는 작품에 내장되는 것이어서 소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소유해도 가질 수가 없다. NFT는 마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있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원본과 복사품이 똑같다면 디지털 세계에선 복사품도 모두 원본일 수밖에 없다. 나는 NFT가 예술 작품의 본질을 헛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보면서 공연자는 물론이고 우리들 인간 모두는 만나서 직접 대면하기 전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어떤 느낌의 대체 불가능 토큰, 즉 고유의 NFT를 가진 존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2년만의 대면 접촉은 우리들 인간들이 서로 직접 만나 부딪치며 살아갈 때 진짜 사람이란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우리는 디지털 세상에서 잊었던 진짜 우리들을 2년만에 되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웃기긴 한다. 이런 얘기를 디지털 세상 덕에 편하게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