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의 연대 —지난 계절의 좋은 시 – 문성해, 김혜순, 김지연의 시

『시로여는세상』, 2021년 가을호

1
공정한 세상을 위한 싸움이 있다. 가령 여성들은 투표권을 손에 넣기 위해 차별의 세상과 싸워야 했다. 영국에서 있었던 서프러제트가 그러한 싸움이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서프러제트>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 싸움이 승리를 거두면서 보다 공정한 세상이 열렸다. 오래 전의 얘기 같지만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그 싸움의 결과로 영국에서 모든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이 1928년이기 때문이다. 영국이란 나라에서 투표권이 모든 여성에게 확대된 것이 아직 100년이 지나지 않았다.
공정을 위한 사회적 싸움에서 힘을 키워주는 것은 사람들의 연대이다. 사실 이러한 싸움에서 연대없이 승리를 손에 넣기란 매우 어렵다. 문제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대로 힘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힘이 커지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인들도 이러한 싸움에서 자신들의 시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연대의 힘을 보탠다. 우연찮게 그 연대의 유형으로 볼 수 있는 세 편의 시를 만났다.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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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의 시로 시작해본다. 시의 첫행은 다음과 같다.

나의 마녀는 벽장 속에서 살지
—문성해, 「나의 마녀」 《시와사상》, 여름호, 부분

마녀와 벽장이라는 두 단어는 그 단어만으로 사회가 금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함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마녀는 어느 시대에나 사회적 탄압의 대상이며, 벽장은 은폐되어 있어 드러나지 않는 장소이다. 그런데 시인에게 그 마녀가 있다. 마녀는 은폐된 곳에 숨겨둘 수밖에 없다. “세계는 언제나 누군가의 화형을 준비하고” 있고, 마녀는 특히 좋은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왜 마녀를 찾아내 태워죽이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녀가 세계의 현재를 지금 이대로 유지하는데 매우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녀는 왜 위험한 것일까.
시인은 자신이 벽장 속에 숨겨둔 마녀에 대해 “내가 아프면 벽장 문을 열고 나와/쐐기풀 환약을 내 혀 위에 얹어주지/달빛과 무덤과 오솔길로 빚은 환약이/내 들뜬 열을 업고 가면/나의 이마는 푸른 악보처럼 펼쳐지곤 했지”라고 말한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허황된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상상 속에선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은 허황될수록 더더욱 불가능이 없어진다. 시인에겐 마녀가 있고, 마녀가 있는 세상에선 불가능이란 없다.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세상은 그 불가능이 없는 마녀의 세상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용할 때 세상이 현재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각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마녀의 세상은 현재의 세상을 뒤흔드는 출발점이 된다. 세상으로선 가장 두려운 점이다. 마녀는 “허리까지 오는 붉은 곱슬머리”를 가졌지만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림을 세상은 가진 적이 없”다. 마녀가 “밖을 나가” “그 붉은 모발을 햇볕 아래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녀를 찾아내 태워죽이려는 세상에서 어떻게 마녀가 밖을 나가겠는가.
마녀에게 밖은 화형의 공포가 기다리는 두려움의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마녀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끊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마녀의 세상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같은/조용하고 따분한 우리의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마녀는 우리의 그 하루를 “뻗으면 붉고 몽롱한 향기가 피어나는/자신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기꺼이 교환하고 싶어한다. 사실 세상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마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세상의 우리는 끊임없이 마녀를 꿈꾼다. 세상이 마녀를 경계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마녀만 세상과 불화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도 세상과 불화한다. 세상이 그걸 쓰고 있으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면서 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도 세상을 견디면서 살아가며, 시인에게 시는 세상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마취제이기도 하다. 마녀는 시인이 “밤마다 쓰는 시라는 마취제를” “자신의 최신 마법 가루”와 기꺼이 교환하고 싶어한다. 둘은 서로의 매력을 알아본다.
마녀는 시인의 벽장 속에선 안전하다. 세상이 마녀를 찾아내겠다고 시인의 벽장을 뒤져도 마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벽장이 시인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 속에 마녀를 숨겨주는 것으로 마녀와 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가장 은밀하면서도 굳건한 연대이다.
두 번째로 김혜순의 시를 읽어본다. 엄마에 대한 얘기이다. 시인은 “아빠가 죽고 엄마는 반짇고리를 들고 퀼트 학원 문을 두드렸다”고 전한다. 나이들어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면 대개 그 도전을 응원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학원의 학생들은 무례했는가 보다. “등이 굽은 최고령 학생인 엄마를 선배 학생들이 깔봤”으며 “할머니! 바늘에 실은 꿸 수 있겠어요?”라고 놀렸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놀림에 굴하지 않았다. “엄마는 만들었다./상처를 꿰매듯이./깊은 강 양쪽을 봉합하듯이./내 필통, 내 핸드백, 내 노트북 가방, 내 책가방, 내 등산 가방, 내 신발 가방, 내 물병 가방, 내 담배 가방”이라는 시인의 전언이 그 점을 확인시켜 준다. 엄마의 가방 만들기는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하나는 가방 만들기가 엄마에겐 가방의 제조임과 동시에 상처의 봉합이자 갈라선 마음의 치유였다는 점이다. 엄마는 가방을 만들면서 그 행위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갈라선 마음을 봉합한다. 그런데 또다른 특이한 사항은 엄마가 만든 모든 것이 딸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오직 딸의 것만 만들었다. 이 둘을 요약하면 엄마와 딸의 사이에는 상처가 있었고 마음은 갈라서 있었지만 엄마가 가방을 만들며 이 상처를 치유하고 갈라선 마음을 봉합했다는 뜻이 된다.
엄마는 가방을 아주 잘 만든 것 같다. 엄마가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가방을 잘 만들면 가방의 대가나 장인이 되어야 하는데 엄마가 가방이 되어 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즉 “엄마가 가방 속으로 숨어버리는 순간이” 오고 “엄마를 여행가방처럼 취급하는 순간이” 닥친 것이다. 시인이 묻는다.

엄마는 알았을까. 결국 이렇게 된다는 것.
태어난 다음 결국 가방이 된다는 것.
—김혜순, 「체세포복제배아」 《창작과 비평》, 여름호, 부분

사실 이런 일이 느닷없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집안일을 하며 식구들에게 매일 밥을 해 먹이면 모두가 그 밥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그러면 엄마는 밥의 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밥순이가 된다. 밥순이란 말에는 밥하는 일을 얕보는 의식이 깔려 있다. 엄마의 밥일에 대한 그 의식 속에서 엄마는 밥을 해주면서 밥에 갇혀 밥이 된다. 가방을 만들던 엄마가 가방이 되어버린 것은 그 때문이다. 엄마는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면 그 일이 되어버린다. 일이 되면 일에 귀속되어 일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땅의 엄마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운명으로 수용해왔다. 그리고 그 운명을 딸들에게까지 강요하기도 했다. 그 강요는 딸들에겐 갈등과 상처가 되었고, 그러면서 엄마와 딸의 사이는 멀어졌다. 하지만 엄마는 변했다. 가방을 만들 때 딸의 가방만을 만들면서 그 가방 만드는 일로 상처를 치유하고 멀어진 마음을 봉합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엄마는 가방을 만들면서 딸과 연대했다.
시인이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엄마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엄마는 “이 새끼 죽는 생각, 저 새끼 죽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 “방정맞은 밤이 무”섭다고 말한다. 그 죽음은 엄마의 온갖 곳을 점거하고 있어 “욕조에서, 서랍에서 자꾸 죽은 사람이 나”올 정도이다. 그 죽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많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하긴 일을 하면 곧 그 일에 자신이 복속되어 버리고, 동시에 그 일을 우습게 보는 사회에서 엄마가 감당해야 했던 삶을 생각하면 엄마의 머릿 속에서 상상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삶을 견뎌가는 위안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엄마가 생명이 없는 것도 “모두 인간 취급”을 하며 “가위 달라 할 때도 거기 걔 좀 줘, 한다 가랑이 빨간 거! 한다”고 전한다. 머릿속 가득 죽음을 품고 살면서 주변의 생명 없는 것을 사람 취급하면서 생명으로 균형을 맞춘 것이다. 시인은 엄마가 “우리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다 죽음과 삶 중간에 있는 거라고”말했다 전한다. 엄마는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엄마는 균형의 존재였다. 딸에게 준 상처와 멀어진 사이를 가방을 만들면서 치유하고 봉합한 것도 그런 균형의 힘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수용하며 사는 듯 보였지만 엄마는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웠다.
딸은 엄마가 가방을 통해 보여준 연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엄마를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 가방을 만들던 엄마가 가방의 장인이 못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인식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시인이 “어떤 가방의 우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가방에 얼굴을 넣고 아 아 아 아 하자 한참 있다가/아 아 아 아 메아리가 돌아왔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할만큼 다 했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이제 나머지는 딸의 책임이다. 딸은 엄마에게서 유전받은 것 중에서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 딸은 “엄마 집에 가서 유품 정리를 하다가/아직 손잡이를 달지 못한 가방을 뒤집어보”다가 엄마가 자신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시인은 가방의 안쪽에 있던 그것에 대해 “아기의 씨눈들이 쌀알처럼 한땀 한땀 박혀 있었다./홍시 한개를 다 먹고 난 다음에 내 허기가 씨마저 가르면/그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이의 눈물 한방울./입김으로 주조한 숟가락같이 볼록한 얼굴./나는 그것에 한없이 눈 코 입을 그리려 했다.내가 그 바느질 땀 하나를 고이 안아 눈먼 새처럼 품어/잠잘 때도 쉬지 않고 흥얼거렸더니/몇달 만에 흐릿한 알 같은 것으로 자라났다./살아 있으면서도 내내 숨을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숨어서 차례를 기다리는/엄마 없는 세상의 수많은 내일, 내일 날씨들 같은”것이었다고 전한다. 나는 그것을 생명을 잉태하여 길러내려는 본능적인 몸의 반응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러한 몸의 반응을 시인이 따라간 것은 아니다. 시인은 머뭇거리고 있다. “햇빛 속에 얼굴을 들면 바늘을 든 피투성이 따뜻한 손이 내 얼굴을 더듬었다./나는 아직 내가 키운 알을 헝겊 속에서 꺼내지 않고 숨겨두고 있다./아기를 낳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난/첫 아기가 될까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기 낳는 것은 주저하게 된 것일까? 그 답은 우리들을 시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시는 사실은 엄마 얘기가 아니라 “아기를 더이상 낳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그 나라 정부는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추측 생산 공표했다./가임 여자들 문제가 제일 크다고 공표되었다”는 구절로 시작되고 있었다. 시인은 가방이 된 엄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엄마가 가방을 잘 만들면 가방의 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방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세상을 수용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시인에게 있어선 그런 세상은 더 이상 아이에게 대물림해선 안되는 세상이다. 시인의 판단은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적 문제를 “가임 여자들 문제”로 떠넘기려 했던 정부의 입장을 뒤엎는다. 답은 가임기의 여자들이 아니라 엄마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에 있다. 시는 엄마를 말하고 있지만 시의 제목인 「체세포복제배아」는 엄마를 출산기계로 바라본 사회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딸은 제목을 통하여 이땅의 여자들이 출산기계냐고 묻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각의 변화를 가방을 만들면서 딸과 연대한 엄마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딸은 엄마의 연대로 힘을 얻어 생명에 대한 본능적 반응을 물려받으면서도 아이를 낳는 것을 주저하는 것으로 엄마와 연대한다. 딸의 주저 앞에서 변해야할 것은 가임 여성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는 김지연의 시이다. 내가 시를 읽으며 생각한 것은 이 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는 이 시가 거리의 가로등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때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우리는 시의 중간쯤에서 그 지점에서의 구절은 만나게 된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 둘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을 본다
—김지연, 「이야기를 깨트리기」 《시로여는세상》, 여름호 부분

말하자면 시인은 교복입는 학생 둘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아는 학생들일리 없다. 학생들이 여학생인지 남학생인지도 언급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이라고 생각한다. 주를 통해 확인하면 시의 제목은 리베카 솔닛이 한국에 왔을 때의 인터뷰에서 나온 얘기이며 그는 페미니스트 작가이다. 아울러 시 중에 인용된 구절의 출처에 대한 주 또한 그 출처의 작가가 에이드리언 리치라고 밝히고 있으며, 그도 페미니즘에 몰두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내가 손가락을 걸고 두 있는 둘을 여학생이라고 추측하게 된 이유이다.
학생 둘이 손가락을 걸고 있다면 그 둘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우정이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그 둘에게서 연대를 보았다고 본다. 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 둘의 연대에 시인이 보태는 또다른 연대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연대는 어떤 것일까.
가장 먼저 시인은 둘을 변화될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는다. 그 둘을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친구들”이라 부르고 있는 시의 시작 부분이 그에 해당된다. 시간은 때로 흐르지 못하고 과거의 시간대에서 정체되어 멈춰선다. 상놈과 양반으로 사람을 갈라 계급화하고 그 차별이 정당화되었던 시대의 시간은 조선시대이다. 그 차별이 여전히 존재할 때 시간은 조선시대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시간이 앞으로 흐르지 못하고 거꾸로 흐르는 역주행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랑을 생물학적 남녀 사이로 국한하여 또다른 사랑의 유형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그 시대의 시간도 흐르질 못하고 역주행한다. 시간이 흐르려면 시간이 흐를 수 있도록 부단히 사회적 문제와 싸워가야 한다. 시인은 손가락을 걸고 있는 거리의 두 친구들이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주머니 속에 갖고 있는 존재란 것을 알아차린다. 흘러갈 시간은 둘의 연대로 시작하여 더 크게 확장될 연대로부터 그 힘을 얻을 것이다.
시간의 정체나 뒷걸음질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굳어진 사회적 인식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사고를 바꾸는 것이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이런 것만이 우리의 소원은 아닐 거야”라는 시인의 말은 바로 그 사고의 전환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사회의 고착된 의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며 나이가 들수록 그 어려움은 더 커진다. 자라나는 세대에게선 그 의식 변화가 좀더 수월하다. 어리거나 젊은 세대는 의식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으로 세상의 변화가 왔을 때 그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게 되는가. 시인은 그 세상이 “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깨고 부수면서 새로운 세상이 오고, 그것은 웃음이 저절로 터지지 않을 수 없을만큼 즐거운 세상이 될 것이란 예고이다. 시에서 이 예고는 미래를 맞는 하나의 의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유대인의 풍습에서 가져온 의식이다. 시에 덧붙여진 주는 “유대인 결혼식에는 식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리잔을 바닥에 놓고 신랑이 오른발로 밟아 깨트리는 풍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풍습을 가져오면서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 그 풍습은 “깨어진 유리잔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결혼임을 상징하”면서 결혼을 지키려는 방향의 의식이었지만 시인은 그 풍습을 오히려 사회의 관습을 깨뜨리며 새세상을 여는 의식으로 삼는다. 때문에 이 의식 속에선 풍습의 원래 소망이 깨진다. 그리고 “깨진 컵을 버리는 여자들과/새 컵을 찬장에 채워 넣는 여자들/우리는 와장창 웃으며 미래로 간다”는 시인의 전언은 거리의 둘과 연대할 여자들이 세상에 무수히 많다는 응원일 것이다.
시인은 세상의 실체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세상은 우리에게 실체로 오기 전에 언어로 먼저 오곤 했다. “세상에는 검은 모래의 해변도 있”지만 그 전에 우리는 백사장이란 말을 통해 해변을 온통 흰모래의 해변으로 배운다. 그 때문에 시인은 “백사장이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우리는/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래를 뭐라고 부를까 골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언어가 세상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가 세상을 배제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시간이 항상 미래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세상은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 미국의 트럼프 시대는 혐오와 차별로 세상이 뒷걸음질친 시대의 좋은 예이다. 시인은 그런 시대를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고 말한다. 그런 세상은 겉은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지만 속은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으로 설익어 있다. 혐오와 차별의 현재가 주는 달콤함이 제대로 익은 과일에서 오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혀 있다. 미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면서 미래로 가야 한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시대는 “뒤로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은 시대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세상의 인과를 흔들자고 말한다. “어떤 어떤 인과도 배운 적 없는 사람들처럼/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걷고 웃고 먹고 잠”들면서 살자는 것이다. “바깥의 여름 속을 걸으면” 덥고, 그때 “더위의 인과를” 묻는다면 “여름이니까 덥지”라는 답이 돌아오지만 시인이 꿈꾸는 것은 그런 상투적인 인과가 아니다. 시인이 그 인과를 버렸을 때 끊임없이 땀이 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땀방울”이 과실처럼 눈에 들어온다. 끈적거리는 “이상한 질감의 피부와 미친 햇빛”도 새로운 인과의 시선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이 시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던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던 똑같은 교복의 여학생 둘이다. 물론 시인은 그 둘이 여학생임을 밝히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어갈 모든 연대는 여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로부터 출발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연대가 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시인은 그 연대에 자신의 마음을 보태는데 그치지 않고 햇볕까지 끌어들인다.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여름 바람이 만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는 것을 본다”고 했을 때 시인이 본 것은 고리를 건 두 학생의 손가락에 걸린,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둘에게 건네는 연대의 표시이다. 이 연대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햇볕의 연대를 두 사람의 손에 얹어준 시인은 나아가 길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을 그 연대에 끌어들인다. 시인은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쏟아져 나와 연대할 것이다. 시인은 그 사람들을 “드러난 사랑의 부스러기들”이라고 한다. 부스러기이니 사랑은 그 세상에선 하나를 고집하며 뭉쳐 있지 않고 부서져 흩어진다.
시인은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고 말한다. 나는 기호가 아니라는 말을 우리는 모두 각각의 실체라는 소리로 들었다. 실체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르고, 모두가 자기 사랑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연대할 때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에 이른다. 어떤 사랑도 그 자리를 보장받는 공정한 세상이다.

3
나는 세 편의 시를 통해 세 가지의 연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첫 시는 마녀와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마녀가 사회에서 금한 것을 꿈꾸는 또다른 나란 측면에서 그것은 나와의 연대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는 엄마와 딸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둘의 연대는 출산율이 줄어드는 원인을 가임기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사회의 부당한 의도를 뒤엎고 그 원인이 오히려 여성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 번째 시는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는 학생 둘에게서 사랑의 연대를 읽어내고 그 둘의 연대에 덧붙이는 시인의 연대이다. 그 연대 속에서 한 세상이 무너지고 모두가 제각각의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공정이 거저 주어지는 법은 없다. 대부분의 공정은 지난한 싸움 끝에 얻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그 싸움에 나선다. 시도 예외가 아니다. 시인들은 그 싸움에 연대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끝내는 이길 것이다.
(『시로여는세상』, 2021년 가을호, 계간시평 지난 계절의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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