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확히는 전화가 아니라 영상통화였다. 둘은 다르다. 전화는 목소리를 내세워 귀를 찾아온다. 전화가 오면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귀로 가져간다. 영상통화는 통화 버튼을 누르면 그녀가 자신의 얼굴로 화면을 채우며 내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묶어 둔다. 그 순간 그녀를 듣던 세상이 그녀를 보는 세상으로 뒤바뀐다. 그녀는 오늘, 듣던 그녀에서 보는 그녀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나야, 라고 말했고 나는 어디야 라고 물었다. 상수동에 있는 세인트 아이브스라고 했고, 핸드폰을 한바퀴 돌려 카페 모습을 핸드폰에 담아주었다. 카페의 창에 담긴 바깥 풍경이 핸드폰 속에서 돌아가며 내 주변을 한바퀴 돌고 있는 듯 했다. 마치 균형이라도 맞추듯 나는 내 핸드폰을 움직여 책상 앞에 놓인 내 책들과 책꽂이를 화면에 담아주었다. 우와, 책 정말 많다. 그리고는 그녀가 말했다. 무서워! 나는 그 말을 되물었다. 무서워? 물론 나는 왜 무섭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책의 세상을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연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진다. 내겐 컴퓨터가 편리하기 이를데 없는 문명의 이기지만 누군가에겐 컴퓨터의 세상이 공포이자 두려움일 때가 있다. 책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너가 책을 보여줬으니까 나는 나의 화장품을 보여줄께. 나는 너의 책만큼이나 화장품이 많아. 그녀가 무엇인가를 손에 들더니 말했다. 이건 섀도우 팔레트야. 내 눈에 그것은 그림 그릴 때 쓰는 팔레트와 엇비슷했다. 팔레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물은 것은 팔레트가 아니었다. 나는 물었다. 섀도우? 그림자에 화장할 때 쓰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아니. 화장은 그림자가 되는 거야. 화장을 하고 나면 나는 내가 만들어낸 그림자로 변모를 해. 그러니까 화장한 나는 사실은 나의 그림자인 셈이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 그림자를 나라고 착각을 하지.
응? 그런 거였어? 나도 똑같아. 내 글들은 사실은 나의 그림자야. 나는 글을 쓰면서 내 그림자를 만들어내. 하도 교묘해서 사람들은 내 그림자를 보고 나라고 착각을 해.
그녀가 말했다. 그럼 너의 책들은 네가 만들어내는 네 그림자의 화장품들이네. 나는 그 말을 곧바로 수긍해 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가 몇 가지 화장품을 더 손에 들며 보여주었다. 이건 아이섀도우 홀리데이 콜렉션이야. 내가 물었다. 그럼 크리스마스 때 나온 건가. 응, 맞아. 이건 피알피엘 쿠션이야. 나는 말했다. 들어도 모르겠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네가 무슨 책인가를 말할 때면 사실은 들어도 잘 몰라. 립스틱은 여러 개 였다. 이것도 립스틱, 이것도 립스틱하며 반복하여 그녀의 손에 립스틱이 들렸다. 그렇게 그녀와 통화를 했고 통화가 끝났다.
통화가 끝나고, 몸을 돌려 방안의 책들을 둘러 보았다. 갑자기 방안에 화장품 냄새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