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과 몸의 달빛

Photo by Kim Dong Won
2023년 8월 20일 서울 방화의 거처에서

지내는 곳에 피아노가 있다. 나는 피아노를 못친다. 그러나 손가락을 눌러 아무렇게나 딩동딩동 음만 울려봐도 피아노 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체감하기에는 어떤 부족함도 없다. 그러니 이 피아노 앞에 피아니스트가 앉아 곡을 연주하면 그 아름다움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가 그리하여 항상 내 상상을 부르고, 그 상상은 집으로 여자를 부른다.

여자에게 말했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건 아무 것도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난 집에 피아노가 있는데 피아노를 칠 줄 모르거든요. 사람들의 돈도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저 갖고 쓰기만 할뿐, 전혀 연주를 못하는 피아노 같은 것이요. 돈을 쓴다는 것은 그냥 피아노를 갖고 있으면서 연주는 못하고 건반 몇 개를 눌러 딩동딩동 거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어, 나, 피아노 칠 줄 아는데. 내가 묻는다. 정말요? 말의 끝에 내가 피아노치는 여자를 만난 것에 대한 놀라움이 완연하게 묻어 있었다. 여자가 분명하게 확인을 해준다. 네, 내가 사실은 피아니스트예요. 여자는 결국 집에 와서 피아노를 치게 되었다.

여자가 친 곡은 베토벤의 소나타 14번이었다. 여자가 첫 악장을 연주하는 동안 방안에 달빛이 가득찼다. 가령 전기 에너지가 빛 에너지로 전환되듯 여자가 건반 위에 손을 짚어 불러낸 피아노의 음들은 모두 달빛이었다. 음은 모두 달빛으로 전환되었다. 그 빛은 은은했다. 내가 지내는 곳의 베란다에서 가끔 마주하던 밤하늘의 달이 내게 조용히 내밀던 빛이었다. 오늘은 그 빛이 음으로 집안에 가득찼다.
여자가 2악장을 연주할 때 나는 집안에 있었지만 가벼운 걸음으로 공원의 밤을 산책할 때 마주했던 달빛을 보았다. 달빛은 이상했다. 밤의 공원을 걷고 있으면 달빛은 나의 보행에 속도를 맞추며 그 밤을 함께 걸었다. 바로 그 달빛이 집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은은하던 1악장의 달빛에 산책의 속도가 붙은 달빛이었다.
3악장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때로 달빛은 빠른 속도로 흐른다. 달빛을 스치는 구름이 그 속도를 확연하게 확인해주곤 한다.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속도를 체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에 구름을 두면 그때는 속도가 체감이 되곤 했다. 달빛도 그렇다. 하늘을 빠르게 흐르기도 하지만 그 속도를 체감하긴 쉽지가 않다. 그러나 구름이 그 속도를 확인시켜 주는 날이 있다. 나는 구름의 하늘을 빠르게 흘러가는 달빛을 한참 동안 바라 보았다.
낮이었지만 집안에 달빛이 가득했다. 아니, 집안은 어둠이었는지도 모른다. 달빛은 어둠 속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빛이 들렸다는 것은 집안이 그 달빛이 잘 보이도록 빛을 지웠다는 얘기가 된다. 낮이었지만 달빛이 잘 들린 것을 보면 집이 한낮의 빛을 모두 지운 것이 분명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가 한낮에 집에 달빛을 가득 채운 날, 또다른 아는 여자가 달빛처럼 밤의 집을 다녀간다. 나는 여자가 빛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항상 여자를 한낮에 만났었기 때문이다. 집에 온 여자는 불을 꺼 방을 어둠으로 채우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몸의 체온을 내 손끝에 묻혀주었다. 손끝에 묻어난 체온은 달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달빛은 손끝에서부터 나를 물들이기 시작하더니 내 몸을 파고들었다. 내 몸은 달빛으로 가득찼다.

피아노의 음들이 달빛이 된 날, 낮의 집은 그 달빛이 환하게 보일 수 있게 한낮인데도 어둠이 되었다. 밤이 되자 더이상 빛을 지울 필요가 없었다. 불만 끄면 집은 어둠이었다. 그러자 여자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달빛이 되었다. 달빛이 된 여자가 그 밤을 다녀갔다.

피아노가 달빛의 두 여자를 불러다 주었다. 하나는 낮에 피아노의 음으로 왔고, 또 다른 하나는 밤에 몸으로 왔다. 그 날은 음과 몸이 모두 달빛이었다.
(2023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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