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Photo by Kim Dong Won
2005년 9월 5일 팔당의 한강변에서


속도는 신나긴 한데 어지러워.
하지만 속도를 버리고 가만히 서 있으면
왠지 무료하고, 또 불안하기까지 했었지.
그래서 달리고 또 달렸지.
그러다 숙명처럼 짊어진 그 속도로부터 버림받았어.
속도는 내가 속도를 감당못한다 싶으니까
여지없이 나를 버리더군.
처음엔 슬펐지만
숙명과도 같은 속도를 내려놓은지 이제 아주 오래.
언제부터 이 자리를 지켰는지도 아득해.
이젠 마음이 평온해.
봄에 발밑을 간지럽히다
머리맡에서 초록빛을 맞대는 풀들과 지내다 보면
계절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 분명히 알 수가 있어.
예전엔 계절이 오는 것도, 또 가는 것도 그냥 지나치곤 했었지.
이젠 해마다 계절을 놓치는 법은 없어.
풀들이 갈아입는 옷의 빛깔로 분명하게 알 수 있거든.
바람이 잰 걸음을 종종 거리며 옆을 스칠 땐
그냥 한 자리에 서서도 마구 달려가는 기분이야.
바람을 친구로 둔 뒤로
가만히 서서도 바람에 몸을 실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속도를 쫓아갈 땐 속도밖에 얻은게 없었는데
속도를 놓고 나니 많은 것을 얻었어.
바람이 종종 놀러와 친구가 되어 주었고,
가끔 빗줄기가 몸을 두드리면
팅팅 속까지 울리는 그 소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어.
발밑에서 무엇인가 꼼지락거린다 싶을 때
봄에 대한 기대로 설레게 되었고,
그럼 어김없이 푸른 새싹이 돋았어.
풀들이 꼿꼿하던 푸른 빛을 버릴 때쯤
계절이 가을로 들어선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때쯤 이유없이 우수에 젖곤해.
이상하지…
속도만 갖고 살던 시절엔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더니
바람을 얻고, 또 계절을 얻었더니
이젠 사는 게 사는 거 같아.

4 thoughts on “바퀴

  1. 처음부터 동원님 글 읽으며
    ‘철학’이 보여서 좋았어요.
    이게 삶이네, 희비네, 고(苦)네.. 라고
    말하지 않고 비유하고 이야기 들려주듯,
    그래서 결국 사유하게 하지요.
    그게 우울의 나락이 아닌,
    긍정의 힘이 전해진다는 점도
    높이 평가한답니다.

  2. ^^ 김동원님은 참 모든 사물에 마음을 싣는군요.
    전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은 저 타이어가 슬퍼보이는데.
    아마도 어렸을때 읽은 동화때문인가봐요.
    길거리에 이리저리 뒹구는 녹슨 못이 슬퍼하던 내용..

    1. 그냥 이제 어쩔 수도 없는데
      그 자리에서 즐겁게 살자는 생각에서…
      저 타이어 말고 강화인가 순천인가 갔을 때는
      뻘에 박혀 서 있는 타이어도 봤어요.
      타이어가 의외로 용도가 다양하더라구요.
      화단으로도 쓰이고, 배에 매달아 충격 방지용으로도 쓰고,
      바람에 지붕 날라가지 말라고 덮어놓은 경우도 있고,
      어린이 놀이터에서 가운데로 빠져나가는 터널로도 쓰이고…
      심지어 타이어마저도 정해진 삶은 없는 거 같아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