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해후

Photo by Kim Dong Won
2024년 3월 5일 경기도 두물머리의 국수역 앞 한 식당에서
나의 그녀, 옥

집 나와서 혼자 산 지 꼭 한 해가 되었다. 지난 해 3월 8일에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올 때 내가 챙긴 것은 시집 두 권이었다. 나는 시집 두 권을 들고 집나온 사내가 되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인의 언어였다. 집 나가는 내 손에 그녀가 들려준 것은 200만원의 돈이었다. 살아가는데 돈만큼 필요한 것도 없다. 돈은 현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살아남는 현실감이었다. 나는 시집과 돈이 그녀와 나 사이의 메꿀 수 없는 현저한 차이이기도 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둘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든 저울에선 그 둘의 무게가 현저하게 한쪽으로 기운다. 내게선 시집이 무게감을 갖고, 그녀의 저울에선 돈의 무게감이 더 크다.

그 저울이 균형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살다보면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기운 무게는 서로를 힘들게 한다. 상대가 내가 하는 일을 가볍게 본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게감의 차이가 빚어내는 불화이다. 그 느낌이 잦은 다툼으로 이어지고 다툼이 남기는 상처가 너무 깊어진다고 느껴질 때쯤 나는 집을 나왔다. 나는 집을 나오며 시집 두 권을 챙겼고, 그녀는 집 나가는 내 손에 200만원의 돈을 챙겨주었다. 둘은 변함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집에 갔지만 그녀가 출근하고 난 뒤의 시간을 골랐다. 때문에 집에 가도 거의 그녀와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칠월의 어느 날, 집에 가서 소파에 누워있다가 점심 시간에 집에 들어온 그녀와 우연히 부딪쳤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언제 왔냐? 였고, 내 대답은 오전에 였다. 거의 5개월 여만이 처음 얼굴을 본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 일곱 마디가 전부였다. 부정적으로 보면 이제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말은 단 일곱 마디에 불과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자면 아직 우리 사이엔 일곱 마디의 말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열두 척의 배가 생각나는 일곱 마디였다.

나는 우리 둘이 변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둘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나는 여전히 시집을 읽고 그렇게 읽은 시들의 느낌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며 그녀는 힘들어 하면서도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선 기적 같이 말이 회복되었다. 서로를 상처내는 공격의 언어가 아니라 상처 없이 편안하게 서로를 주고 받는 말이다.

나는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을 망각의 힘이라고 본다. 눈앞의 얼굴은 싸울 때 가졌던 분노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때문에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면서 지내면 싸움이 남긴 분노가 잘 사그라 들지를 않는다. 하지만 얼굴을 못보게 되면 양상이 크게 변한다. 싸움의 분노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그 분노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우리 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매일 분노를 환기해야 했던 시절의 기억을 이제는 잊었다고 보는 편이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변해도 문제이다. 시와 돈 중 중요한 한 가지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아도 잊으면 함께 살 수 있다. 항상 붙어 살 때는 잊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따로 살면 잊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한 해의 세월은 바로 시간이 가진 그 중요한 덕목으로 우리 사이를 회복시켜 주었다.

집에 가서 사흘 동안 지내다 왔다. 그녀가 해주는 밥을 먹었고, 같이 두물머리로 놀러 나갔다. 설거지는 내가 했다. 서로 편한 시간이었다. 한 해 전의 우리는 하루도 참을 수가 없는 사이였지만 한 해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제 하루는 참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시집 두 권을 들고 집을 나간 사내는 이제 천 권의 시집이 그리워 다시 집으로 돌아온 사내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둘은 다르다. 내 얘기의 대부분은 내가 쓰려고 하는 글들에 할애가 되고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 얘기를 한다. 그래도 서로가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다시 말들이 우리 사이에 뛰어놀게 되었다. 그렇게 사흘을 보냈다.

다시 집을 나서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자유롭게 지내다 또 봐. 그녀가 이번에도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약간의 돈을 내밀었다. 지난 해 집 나올 때 내 결심 중의 하나는 내 곁에서 돈을 지워버리고 살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돈이 싫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무너졌다. 그녀가 주는 돈을 고맙다는 말과 맞바꾸며 낼름 받아서 챙겨나왔다. 동시에 요즘 나온 좋은 시집들을 열심히 읽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