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독일 히틀러 정권 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절을 다룬 영화이다. 대개 이 시절을 다룬 영화가 독일군의 야만과 몰락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소장의 풍요로운 가정을 영화의 주내용으로 삼고 있다. 담장 너머의 안에선 유대인이 무수히 학살되지만 담장 밖 아우슈비츠 소장의 집은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기 이를데 없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진 의문의 하나는 은폐된 채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가고 있을 때 피아노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였다. 피아노라고 했지만 그 의문은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선 한 소녀의 피아노 연주가 그 답을 암시한다.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영화는 자막으로 그 연주가 사실은 “아직은 오지 않은 자유의 깃발을” 꿈꾸는 저항의 노래임을 알려준다.
예술의 본질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떤 풍요와 행복이 인간의 학살이라는 범죄를 바탕으로 할 때 머릿속을 그 상황에 대한 외면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몰래라도 그 현실을 예술의 형식에 담아내고 피아노 앞에서 그 노래를 연주할 때 우리의 머릿속을 그 범죄 정권에 대한 저항과 자유의 꿈으로 채워 학살이란 범죄 행위가 당연시되는 생각의 지배를 막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도 예술로 채워서 막아내는 머릿속의 생각을 막을 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많은 목숨을 잃은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이제는 팔레스타인을 공습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팔레스타인과 연대하여 목소리를 모으고 공습을 멈추라는 함성이 되었다. 이소선합창단은 광화문에서 마련된 이 집회에 노래로 함께 했다.
나는 또 묻게 된다. 수많은 목숨이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격 앞에서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함성은, 또 합창단의 노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우슈비츠 시절의 피아노와 똑같다고 본다. 실제로 이소선합창단은 광화문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규탄 집회에서 아우슈비츠 시절의 피아노가 꿈꾸었던 것과 똑같은 자유의 노래를 불렀다. 첫곡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였다. 군부독재 시절의 우리를 노래했던 그 노래는 고스란히 이스라엘의 강압 통치 아래 놓인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그들의 노래가 되어 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솔은 암울한 시절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놓지 않는다. 피아노가 그 선율 속에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놓지 않았던 것과 똑같다. 합창단은 또 <민중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우리가 뭉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외치는 함성은 뭉친 목소리이다. 사람들이 뭉치고 연대하고 있음을 노래는 알려준다. 마지막 노래는 <그날이 오면>이었다. 노래는 그날이 온다고 말한다. 자유의 깃발이 휘날리는 날일 것이다.
모여서 집회하고 노래하는 것이 무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집회의 함성과 노래는 강자가 지배하는 힘의 세상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당연시되는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내고 우리의 머릿속을 폭력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 대한 꿈으로 채워준다. 가장 무서운 것은 힘의 논리가 우리를 물리적으로 지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각마저 지배할 때이다. 그러나 어떤 폭격으로도 우리 머릿속의 저항과 자유는 무너뜨릴 수 없다. 간혹 힘이 없어 우리가 일제 식민지 시절을 살았다며 일제 병탄의 죄과를 우리 스스로가 뒤집어쓰고는 그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작자들이 나타나곤 한다. 일제의 힘이 단순히 우리의 생활만 억압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까지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 생각을 밀고 나가면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 처지로 내몰린다. 진정한 예술은, 그러니까 진정한 피아노 연주는, 또 진정한 노래는, 그 노래가 함께 하는 함성은 그런 생각의 지배를 막아내고 끝끝내 우리로 하여금 반인간적 범죄에 저항하고 싸우게 해준다.
사람들과 노래는 광화문에서 끝없이 외쳤다. Free Free Palestine!! 어떤 폭격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꿈이었다. 그 저항과 꿈이 이 한국의 광화문 거리에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