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집을 나가 1년 6개월 동안 5호선의 서쪽 끝인 방화역 근처에서 방을 얻어 혼자 살았다. 집을 나가 혼자 산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올해는 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아 내년에 다시 나가보려고 창작촌의 입주 작가 신청을 했지만 안됐다. 당분간 계속 집에서 작업을 하며 머물러야 할 듯하다. 그래도 가장 힘든 시기는 넘기고 조금 적응한 듯 싶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 사이의 갈등이다. 특히 같이 사는 사람과의 갈등이 가장 힘들다. 매일 얼굴을 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살면 그런 갈등이 전혀 없다. 얼굴 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절 사람과의 대면이 어려워지면서 사람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마음 잘 맞는 사람이 아니면 사람과의 대면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창작촌 입주는 무산되었지만 돈 모아서 어디 지방쯤에 한달쯤 머물 수 있는 방을 얻고 혼자 지내는 시간을 다시 갖고 싶다. 한달 정도는 어떻게 지내도 큰무리 없이 가능할 듯하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거의 집에만 머문 것 같다. 그녀와 딸을 일행삼아 전주와 대전을 다녀왔고, 딸의 일본인 친구 히로타가 왔을 때 다시 대전을 함께 다녀왔다. 문원민의 시집이 나온 뒤에 아는 얼굴과 일행을 꾸려 부산을 1박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그 이외에는 어디 다녀온 기억이 별로 없다.
올해는 해의 말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다치는 우환이 있었다. 손목 골절로 수술을 받았고 일주일만에 퇴원했다. 다행이 경과가 좋다. 어머니 건강이 나의 큰 복이었는데 빨리 그 복이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집나가 있는 동안 좋은 친구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가끔 술을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던 술친구였다. 그 친구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예전에는 술을 마시면 항상 집에 갈 시간을 염두에 두었는데 이제는 동네서 시간을 힐끗거리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네는 밤새워 술마실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래도 전화하면 금방 마음을 맞춰 술자리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딸이 올해 승진을 하고 회사에서도 능력을 좋게 평가받는 듯 싶다. 연봉도 많이 오른 듯하다. 자식 잘되는 것은 부모의 큰 복이다. 가끔 자식 자랑을 입에 올리면서 살고 있다는 측면에선 내가 걱정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사는 측면이 있다.
항상 그랬듯이 해의 말에 올해 찍은 사진들 가운데 한 달에 한 장씩의 사진을 골라 올해를 마무리해 본다.
1
눈이 내렸지만 나무에 맺힌 것은 물방울이었다. 눈을 기온으로 세공하면 항상 물방울 보석이 된다. 나무가 잠시 가지를 장식하는데 쓴다.
2
속초의 청초정이다. 나는 속초하면 영금정밖에 몰랐다. 영금정은 낮에도 가보고 밤에도 가봤다. 이번에는 청초정을 낮에도 가보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도 가봤다. 청초정은 청초호에 있고 내가 묵은 숙박 시설이 그 근처에 있었다. 이른 아침이 더 분위기가 좋았다. 지붕 위가 환했으나 아침해의 빛은 아니었다. 청초정의 지붕 위는 해가 뜨거나 말거나 빛날 수 있었다.
3
저녁은 알 수가 없다. 서쪽으로 지면서 창으로 들어와선 북쪽으로 길을 낸다. 그 길에 서면 가는 저녁이 잘 보이긴 했다. 저녁의 길은 갈려고 펴는 길이 아니라 남는 이들이 손흔들어 작별하기 좋게 펴놓는 길이다.
4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내게 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도시의 밤은 다르다. 도시에서 밤은 세상이 낮과는 전혀 다르게 얼굴을 바꾸는 시간이다. 밤에도 세상이 반짝거리면서 환하게 보인다.
5
산딸나무의 시절이다. 마치 얼굴이라도 내밀듯 잎들 사이로 꽃들이 사이사이 피었다.
6
나는 길을 횡단하고 구름은 길위의 하늘을 횡단한다.
7
비가 비스듬히 옆으로 날렸다. 차가 바람처럼 달리자 비가 차창에 빗줄기로 바람을 새겨주었다.
8
논에는 온통 가을이었다. 황금보다 더 아름다운 황금빛을 가을의 벼가 갖고 있다.
9
가을 가을한 날이었다.
10
나무밑에 앉으면 계절이 어깨위로 내려 앉는다. 가을은 계절을 어깨에 얹어줄 수 있다.
11
색이란 칠하는 것이 아니다. 잎에 받아 채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아름다운 채색을 얻을 수 있다.
12
겨울이 되면 팔당의 한강으로 고니가 찾아온다. 그때부터 한강은 강을 버리고 백조의 호수가 된다. 고니는 강을 호수로 바꾸고 음악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