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바닥으로 열리고 확장된 뻘과 널배 이야기 —이서화의 시 「어떤 바닥에 대하여」

Photo by Kim Dong Won 2004년 12월 17일 전남 순천만에서

시인 이서화의 시 「어떤 바닥에 대하여」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닷가 마을, 어느 집 벽에 널배를 세워놓고 말리고 있다
—이서화, 「어떤 바닥에 대하여」 부분

말하자면 바닷가의 어느 마을에서 시인이 널배를 본 것이다. 나는 이 구절만으로도 반가웠다. 왜냐하면 나도 널배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순천만에 갔을 때였다. 시의 첫 구절이 반가움이 된 것은 경험의 공유에서 온 것이다. 누군가 여행지를 얘기했을 때 나도 거기 가본 적이 있다는 말과 함께 표시하게 되는 반가움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나도 널배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 구절을 읽을 때의 내 마음을 반가움으로 채워준다.
널배는 끝에 배라는 호칭이 붙어 있지만 배라기 보다는 길다란 널판지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널배는 널판지배를 줄인 말로 보인다. 뻘의 먼 곳으로 나가 조개나 바지락을 캐는 바닷가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구이다. 한쪽 다리를 널배의 바깥으로 내놓은 상태로 몸을 널배에 싣고 바깥의 다리로 뻘을 밀며 미끄러져 나간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뻘배라고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수명이 길고, 속도가 빠른 삼나무”로 만든다는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대상을 본 적이 있다는 경험의 공유에서 온 반가움은 그 다음 구절에서 놀라움으로 바뀐다. 시인이 내가 본 세상을 전혀 다르게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끄러지며 지나온 곳이라 바닥의 나날들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러니까, 저 바닥은 썰물과 밀물을 기억이라고 물의 바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물의 바닥은 출렁이지 않았지만 물이 쉽게 놓치는 것을 바닥은 꼭꼭 숨겨놓고 있다
—이서화, 「어떤 바닥에 대하여」 부분

짐작이 가겠지만 “미끄러지며 지나온 곳”을 우리는 뻘이라고 부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닥의 나날들”에서 바닥은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채 말리고 있는 널배의 바닥이다. 시인에 의하면 그 바닥은 다른 바닥을 기억하고 있다. 시인은 바닥이 기억하고 있는 그 바닥을 “물의 바닥”이라 일컫는다. 물의 바닥은 정확히는 물의 맨 아래쪽 부분이 아니라 사실은 뻘이다. 더 나아가 그 “물의 바닥”은 높고 낮음으로 구별되는 어떤 위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억이며 그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썰물과 밀물”이다. 그것이 위치인 동시에 기억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뻘이기 때문에 “물의 바닥은 출렁이지 않”는다. 시인은 “물이 쉽게 놓치는 것을 바닥은 꼭꼭 숨겨놓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얘기는 출렁이는 바다는 무엇인가를 쉽게 놓친다는 말이 된다. 바닷물 속에선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물고기들을 바닷물 속의 한 자리에 묶어 숨겨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뻘 속에선 바지락과 조개 같은 온갖 생물체가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뻘에서 캐내는 바지락과 조개를 바로 바닥이 숨겨놓은 것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뻘이라고 부르는 곳에 대해 전하고 있지만 한번도 뻘이라는 말은 언급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대개 시인이 가진 뛰어난 표현 능력으로 수긍하는 편이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시인이 뻘에 대한 표현을 달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뻘이라고 부른 곳에서 뻘이 아니라 썰물과 밀물을 기억으로 가진 물의 바닥을 보았고 그것을 고스란히 언어로 옮겨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다른 것을 본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그 말로 옮겨갈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그 말 속에 우리가 보는 것을 가두는 경향이 있다. 가령 우리는 뻘을 보면 뻘이라는 말로밖에 그 뻘을 보지 못하게 되는 습성에 갇혀 있다. 말은 우리에게 대상을 해당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보게 해주지만 동시에 그 말로밖에는 대상을 보지 못하게 우리는 그 말 속에 가둔다. 뻘은 보는 순간 우리는 뻘이라는 말에 갇힌다.
그 말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말 앞에서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바로 그 자유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 자유의 존재가 뻘 앞에 서면 뻘이란 언어는 그 존재를 뻘이란 말 속에 가두질 못한다. 그 순간 뻘이 아닌 다른 세상, 바로 썰물과 밀물을 기억으로 가진 물의 바닥이란 말로 형상화되는 세상이 그 존재 앞에 펼쳐진다. 시인이 시로 옮겨갈 다른 세상을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의 미덕은 우리가 뻘의 세상을 물의 바닥이라는 또 다른 세상으로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확장은 물의 바닥에 그치지 않고 더욱 폭넓게 확장된다. 이서화가 다음 단계의 확장을 위하여 끌어들이는 것은 우리들이 문학과는 대치점에 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과학이다. 과학에 의하면 썰물과 밀물은 지구와 달의 중력 작용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다. 과학의 힘을 빈 뻘의 세상은 이제 이렇게 확장된다.

썰물을 밀고 나갔다가 밀물을 달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던 셈이니 달의 조력자이거나 달을 실천한 지구살이의 도구 였던 셈이다

지구와 달, 그 사이와 사이를 밀고 또 밀었다
—이서화, 「어떤 바닥에 대하여」 부분

시인이 확장한 세계 속에서 바닷가 사람들이 널배를 타고 나가 조개와 바지락을 캐서 돌아오는 시간은 단순히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썰물을 밀고 나갔다가 밀물을 달고 돌아오는 시간”으로 재편된다. 널배는 그 시간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측면에서 널배는 “달의 조력자이거나 달을 실천한 지구살이의 도구”이다. 이제 널배를 이용하여 뻘에서 조개와 바지락을 캐는 행위는 뻘에 묶여 살아가는 생존 방법이 아니라 “지구와 달, 그 사이와 사이를 밀고 또 밀”며 살아가는 행위로 성격이 크게 바뀐다. 바닷가에 묶여 있던 뻘이라는 위치가 지구와 달 사이로 조정이 된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걸어다니면서 살고 있지만 지구와 달 사이, 물의 바닥으로 이루어진 그 세상에서의 보행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곳에선 앞으로 나아가려면 “밀고 또 밀”어야 한다. 이서화는 그곳에서의 행위와 보행을 좀 더 구체화한다.

그믐이 파종한 달의 주기를 환한 낮에 캐내었을 것이다 물결보다 더 부드러운 바닥, 노을이 묻은 바닥을 밀고 또 밀었다 나갈 때도 뒷걸음질이었고 들어올 때도 뒷발질이었다
—이서화, 「어떤 바닥에 대하여」 부분

그믐은 가장 어두울 때이다. 그믐 때 파종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믐 때 썰물이 가장 멀리까지 빠지는가 보다. 뻘을 가장 멀리까지 나갈 수 있는 때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멀리 나갈 수 있다. 널배를 타고 뻘을 미끄러져 나가 조개와 바지락을 캘 때 그 보행은 뒷걸음질과 뒷발질로 이루어진다. 정상적인 걸음은 발이 뻘에 빠져 앞을 나갈 수 없지만 뒷걸음질과 뒷발질은 그 뻘에서 앞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한다. 널배에 의탁한 삶은 걷지는 못하지만 그 상황에 발목이 잡혀 있지 않다. 그 삶은 삶을 밀며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오늘은 바닥이 쉬는 날이라 했다
—이서화, 「어떤 바닥에 대하여」 이상 전문

살다 보면 인생이 바닥을 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법이다. 힘 겨울 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 삶이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이라면 더더욱 그런 순간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삶이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런 순간을 우리는 바닥의 순간이라 말하기도 한다.
시인의 미덕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그런 바닥의 순간이 사실은 삶의 경쟁에서 밀려나 걸음도 제대로 뗄 수 없는, 마치 뻘과도 같은 삶의 바닥에 발목이 잡힌 순간이 아니라, 지구와 달 사이, 썰물과 밀물을 기억하는 물의 바닥에서 삶을 밀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순간이란 점을 환기시키며 그 삶을 위로하는 새세상을 우리 앞에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선 “바닥이 쉬는 날” 알 수 있게 된다. 그 삶이 사실은 윤이 나는 빛나는 삶이란 것을.
그 때문에 나는 이서화의 시 「어떤 바닥에 대하여」를 읽으며 노동으로 삶을 밀고 가고 있는 세상 모든 삶에게 바치는 어떤 찬가 같은 노래를 들었다.
(2025년 7월 6일)
(인용한 이서화의 시 「어떤 바닥에 대하여」는 ⟪시로여는세상⟫ 2025년 봄호에 실려 있다.)

1
Photo by Kim Dong Won 2004년 12월 17일 전남 순천만에서

4 thoughts on “물의 바닥으로 열리고 확장된 뻘과 널배 이야기 —이서화의 시 「어떤 바닥에 대하여」

  1. 시를 발표하면 누가 읽기나 할까? 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발표해도 되나?
    아무튼 여러가지 생각으로 발표를 하게 됩니다.
    선생님처럼 이렇게 깊게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힘이 나네요.

    오래도록 기억되던 널배가 잊혀지지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2. 시를 발표하면 누가 읽기나 할까? 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발표해도 되나?
    아무튼 여러가지 생각으로 발표를 하게 됩니다.
    선생님처럼 이렇게 깊게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힘이 나네요.

    저는 이 부분에 밑줄을 긋습니다.
    고맙습니다.

    1. 오랜만에 블로그 들어와 댓글을 쓰다보니 아래 글 수정하는데 안되어 자꾸 올라가네요. 수정하는 란이 없어 그냥 둡니다.

      1. 덕분에 댓글이 세 개나 달리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어요. 좋은 시를 찾아 부지런히 읽고 써보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데 이 시를 읽자 마자 시를 읽고 써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세상의 숨은 모습을 찾아내는 물리학자와 시인이 같은 부류가 아닐까 느끼곤 하는데 과학이 나란히 가는 점도 아주 좋았습니다. 좋은 시, 감사드려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