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스프가 있는 저녁

때로 결과보다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더 클 때가 많다. 음식은 특히 그렇다. 재료가 모습을 완전히 바꾸면서 맛의 세계를 여는 그 일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평범한 음식에서도 그러한 경이는 예외가 아니다. 단호박 스프가 조리되는 과정의 옆에서 그 경이를 지켜 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 스프이니 단호박은 필수이다. 보통은 찜통에서 쪄먹던 것이다. 그러나 단호박 스프가 되는 길의 단호박은 스프가 되기 위해 5분 동안 전자레인지에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단호박의 몸이 따뜻하게 덥혀 졌다. 속은 말랑말랑해졌을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은 몸을 나누고 속의 씨앗도 내놓았다. 스프가 원하는 것은 오직 단호박의 과육이었다. 스프가 되려면 스프가 원치 않는 것은 버리고 원하는 것만 남길 수밖에 없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 스프에 버터도 들어간다. 버터는 양파를 볶는데 이용된다. 버터로 볶으면 맛이 다르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버터를 녹여 양파를 볶는다. 고소한 향기가 난다. 그렇게 들들 볶이는데도 좋냐. 나는 양파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가 잔소리로 날 들들 볶으면 정말 지겹던데. 양파가 말한다. 그녀에게 부탁해. 잔소리에 버터를 녹여달라고. 문득 그녀가 잔소리만 할 줄 알았지 요리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는 양파만으로는 요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양파는 볶이면서 향기나는 다른 인생을 맛보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의 껍질을 벗긴다. 껍질은 쓸데가 없었다. 스프를 할 때 껍질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외침 앞에 사라져 가는 운명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껍질을 벗겨낸 단호박의 속을 썰어넣고 미리 볶아놓은 양파과 함께 뒤섞어 다같이 볶기 시작한다. 아직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스프의 길은 조금 더 남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우유를 단호박 스프에 넣는다. 우유가 속삭인다. 단호박 스프 너에게 우유 빛깔 뽀얀 피부를 안겨주겠어. 그러나 단호박 스프는 그런 피부를 원치 않았다. 단호박 스프는 노란 피부를 고집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냄비의 뚜껑을 닫고 팔팔 끓인다. 뚜껑에 물방울이 잡힌다. 안에서 호박 스프가 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 스프의 마지막 순서는 스프 속에서 덩어리를 고집하고 있는 단호박을 잘게 갈아주는 것이었다. 이제 형태는 없다. 오직 맛만 남을 뿐. 스프는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직 맛을 위하여 모두 형체를 버린다. 고체를 버리고 액체의 맛을 취하는 것, 그것이 단호박 스프의 세상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단호박 스프가 완성되었다. 딸이 했다. 나는 곁에서 지켜보며 기록했다. 혀가 녹고 식도도 그 맛에 녹아나려 했다. 위에 뿌려놓은 것은 허브이다. 어느 날의 우리 집에서 맛보는 특별식이 된다.

Photo by Kim Dong Won
2020년 10월 3일 우리 집에서

딸이 단호박 스프를 한 날, 나의 저녁은 피자 한 조각, 단호박 스프, 방울 토마토 네 개였다. 단호박 스프가 저녁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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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단호박 스프가 있는 저녁

  1. 음 ㅡ 껍데기는 가라 ㅡ진짜 오랜만에ㅡㅠ ㅡ 고체를 버리고 ㅡ라니. 그랬구나 싶네요. 버릴 것은 버려야 새로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못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 했던 것들 . 문득 용기. 라는 말이 피어오릅니다.

    1. 보통 그냥 쪘을 때는 껍질 째 먹었는데 스프를 끓일 때는 껍질을 벗겨 내더군요. 요리는 지켜보는 것도 즐거움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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