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란 생각하기 나름일 것 같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아마 생각을 바꾸는게 그렇게 쉬웠다면
김아중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강한나가
굳이 전신 성형으로 몸을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은 쉽게 바꾸기가 어렵다.
차라리 그보다는 몸전체를 성형으로 뒤바꾸는게 더 쉽다.
몸보다 더 바꾸기 어려운 것, 그게 바로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타고난 우리들의 몸에 속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우리들의 굳은 생각에 포박되어 있다.
60을 넘긴 나이에 매일 조기 축구회에 나가
펄펄나는 몸을 과시하는 노익장의 나이든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우리들이 몸에 구속되어 있지 않음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시대가 그들에게 강요했던 생각에서 자유로운 경우는
그렇게 자주 마주하기가 어렵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을 고리타분해 한다.
몸의 속박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어도
생각의 속박은 끈질지게 사람들을 그 속에 가두고 놓아주질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가령 내가 산을 내려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산에서 마주했던 낭떠러지엔 무엇이 살던가를 물었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깎아지른 절벽에 삶의 둥지를 틀고 뿌리를 내린
나무들의 끈질긴 삶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낭떠러지엔 작은 틈을 비집고 뿌리를 밀어넣은 뒤
끈질기게 삶을 개척하는 불굴의 의지가 살고 있었노라고.
몇몇 사람은 그 얘기를 하며
나무들이 보여준 그 불굴의 삶에 감동의 눈물까지 글썽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이제는 하도 거듭되어
상투적이란 꼬리표를 조롱삼아 달아주기에도 식상한 측면이 있다.
때로 삶의 잠언으로 작용한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제는 굳어버린 생각의 속박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찌보면 그런 생각을 교육받았고,
낭떠러지 앞에선 나무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나무가 보여주는 불굴의 삶이란 생각에 자연스럽게 속박된다.
내가 젊은 시인들의 시를 자주 들여다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은 그 상투적 상상력을 벗어나는 재기발랄함으로 무장을 하고 내게 손을 내민다.
그들의 손을 잡을 때 나는 나를 가둔 생각의 경계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마련한다.
그래서 난 낭떠러지엔 무엇이 사는가라는 같은 질문을
시인 진수미에게 던지고 그가 내민 대답을 받아들었다.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낭떠러지에는 비명이 살고
비명을 삼키려고 그들은
벌린 입아귀에
주먹 대신 나무 둥치를 쑤셔넣는다.
비명을 받아먹으며
낭떠러지에서 사육되는 나무들의
유일한 취미는
추락하는 자의 옷자락을 거머쥐는 것이다.
놓아줄까 말까 그들이
낄낄대는 동안 절벽의 여행자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다.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진수미, 「……………………………….」 전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누구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이 그런 장면을 직접 보았을 리는 없다.
그러니 실상을 캐고들면 영화를 너무 많이 본게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사람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은 부지기수로 나오지 않던가.
어느 정도 최근의 영화를 생각해보면 영화 「300」에서도
비록 낭떠러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페르시아의 사신들을 걷어차
속이 시커멀 정도의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뜨리던 장면이다.
추락이라는 성격으로 보자면 모두 비슷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선 그렇게 사람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면 모두 비명을 지른다.
아마도 시인은 낭떠러지 앞에서 그런 영화 속의 추락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이 “낭떠러지에는 비명이 살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감각의 세상을 낳는다.
하지만 비명으로 따지자면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사람보다
항상 깎아지른 절벽으로 살아가야 하는 낭떠러지 자체가 가장 크게 지르게 되지 않을까.
평생을 깎아지른채 추락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낭떠러지는 아무 말이 없다.
진수미에 의하면 그것은 낭떠러지가 “비명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팔이 없는 낭떠러지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주먹 대신 나무 둥치를” “벌린 입아귀에” “쑤셔넣”고 있다.
어쩌다 낭떠러지가 평생을 추락하면서도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를 수 없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너무 슬프면 눈물마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추락의 삶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추락하면서도 비명마저 지를 수 없는 비극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인생이란 종종 그렇게 엎친데 덮친다.
요 얘긴 요 정도로 정리하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영화에선 떨어지던 사람들이 곧잘
낭떠러지의 나무에 걸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곤 한다.
진수미에게 그것은 “추락하는 자의 옷자락을 거머쥐는 것”이
“나무들의/유일한 취미”이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그렇게 추락하는 자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놓아줄까 말까” “낄낄” 댄다.
어떠셨는가, 시인의 이 독특한 발상이 재미 있으셨는가.
나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못됐다.
재미나다 싶어 절벽의 나무들과 함께 낄낄대고 있는데
시인이 마지막 구절을 슬쩍 디밀었으며,
그 구절은 목구멍의 가시처럼 내 목에 걸렸다.
아이구, 켁켁…
아니, 이게 뭐야, 마지막에.
시인은 말한다.
이런 세상은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만이라고.
우리는 좀 당혹스러워진다.
“달의 코르크 마개”라는 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래도 찬찬히 풀어보자.
일반적으로 코르크 마개가 1차적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와인, 즉 포도주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포도주병이 아니라 달과 묶어놓고 있다.
그러니 시인은 포도로 포도주를 담근 것이 아니라 달로 술을 담그고
그걸 코르크 마개로 닫은 뒤 숙성시킨 것이 분명하다.
달은 과학이 탐색하고 분석하여 낱낱이 재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화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과학의 경계 안에 아무리 가두어 놓으려해도
우리들은 달을 쳐다볼 때 그 경계를 훌쩍 넘어가 버린다.
시인은 그 달로 술을 담으면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에 취해 그 취기로 과학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는다고나 할까.
시인은 달을 담은 뒤 그 술병을 코르크 마개로 닫아놓는다.
그러면 코르크 마개를 따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럼 영화가 끝난다.
영화는 수많은 꿈을 그려내지만 대부분의 그 꿈은
영화관 안에서의 세상일 뿐이다.
우리는 바깥의 현실과 단절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그 꿈의 세계를 실제인양 즐긴다.
그러다 영화가 끝나면 그 세계를 훌훌 털어버리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영화관 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시인은 시와 현실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즐기려면 현실의 경계를 버리고 시의 나라로 걸음해야 한다.
마치 영화관으로 들어가듯이.
시의 세계란 달로 술을 담그고 그에 취했을 때 즐길 수 있는 세계이다.
물론 젊은 시인은 달로 술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달을 포도주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로 막아두는 그만의 숙성법을 갖고 있다.
젊은 숙성법이다.
달을 그대로 숙성시키던 옛방법은
시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뭉개면서 마치 시를 현실인양 호도하곤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 문을 나서고 난 뒤에도 영화의 잔상에 오래 시달렸다.
아니 영화의 잔상이 계속 우리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진수미는 옛방법을 버린다.
달을 그대로 숙성시키질 않고
포도주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로 막은 뒤 숙성시킨다.
그리고 마개를 뽑기 전까지만 그 세계를 즐기도록 한다.
마개를 뽑고나면 영화관을 나서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우리들처럼
우리는 깔끔하게 현실로 돌아온다.
맨 뒤에 배치되어 있지만
그러고 보면 달을 포도주병에 담고 코르크 마개로 막아 숙성시키는 것이
낭떠러지 앞에서 나무가 보여주는 불굴의 삶, 어쩌구 하는 생각에 묶이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다.
시인은 그 힘으로 낭떠러지 앞에 선다.
시인은 이제 낭떠러지 앞에서 아무 말이 없다.
말없음표를 이어놓은 시의 제목은
아무 말없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해준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동안 우리의 생각을 묶고 있던 굴레를 벗어나
아무 말없이 낭떠러지 앞에 서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가 마주한 낭떠러지엔 비명이 산다.
흐유, 다행이다.
이제 목에 걸렸던 가시가 비로소 넘어갔다.
시인이 달을 포도주병에 넣고 코르크 마개로 막아 담가놓은 술이 여기 있으니
다음에 산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 들고가 보시라.
그리고 낭떠러지를 만났을 때 그 앞에서 한번 즐겨보시라.
요즘의 젊은 시를 즐기려면 이제는 코르크 마개를 닫힌채로 둔채
그 병속의 달 속으로 풍덩 빠지셔야 한다.
다만 코르크 마개가 열리는 순간, 온몸의 휘감던 취기가 온데간데 없을테니
그건 알아서들 하시고.
10 thoughts on “낭떠러지엔 무엇이 사는가 – 진수미의 시 「……………………………….」”
안녕 하세요 저이름이 진수미에요
생일은11월1일이고요
설마 이 시의 주인공은 아니시겠죠.
진수미 시인은 제 후배랍니다.
예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을 만나니 저도 반갑습니다.
어차피….방학 기간이라 깊은 밤은 아닌 듯 해요 저에겐…ㅎ
새벽 두시까진 글 좀 보구요.
치이~
저 한 미모하면 어쩌려구요 ㅎ
암튼,
두달 동안은 쉬지않고 보렵니다.
그럼 열혈독자 한 분 생긴 건가요.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한 미모 그냥 믿기로 하겠습니다.
친한 동료 아낙 열명이서 며칠전에 향일함에 다녀왔는데…
거서 찍은 사진이랑….
와온쪽으로 들려 낙조를 보면서……찍은 사진이 카페에
올려져 있는데…나이 들어가면서 젤 자신없는 게 사진 찍어 보는거…
정말 한숨만 나오네요.ㅎ
올려져 있는 글들 보려니…맘이 분주 하네요.
좋은 저녁 되시구요.
저희도 지난해 향일암 여행했는데…
향일암엔 두번 갔었죠.
혼자 한번, 같이 한번.
나이들어도 자기 나이에 자신을 갖는게 좋을 거 같아요.
세월을 보여주는 얼굴이란 깊이가 있거든요.
또 미모는 껍질 한겹이란 말도 있구요.
이 블로그는 글이 많아서 그냥 천천히 보시면 되요.
이미 밤이 깊었으니 좋은 밤 되세요.
당신이 요즘 시를 읽고 친절히 글을 써주니까 참 좋다.
그것도 아주 쉽게.
평론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고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읽어도 아하~ 할 정도로 쉬웠으면 좋겠어.
사족…
달의 코르크 마개는 시인이 절벽에 앉아서 저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둥근 달이 뽁~ 하고 떠오른 건 아닐까.
마치 와인 병을 딸 때 나는 그 소리처럼 순식간에.
그 순간 취기 확 달아나지~
나두 둥근 달이 뽁~ 하고 떠오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
쟤 언제 떴지.. 하면서…
재미난 상상이군.
달 자체를 코르크 마개로 본거네.
그렇게 보아도 결론은 같이 나오겠어.
신화적 상상력의 원천인 달을 뽑아버리니 현실로 돌아올수밖에 없는 거니까 말야.
근데 달이 뜰 때까지 산 위의 절벽에 앉아있었을 시인은 아닌 것 같은데… 달을 코르크 마개로 보는 건 상상으로는 좀 어렵고 몸으로나 포착이 되는 감각이거든. 요즘 젊은 시인들은 자연과 같은 고전적인 시적 대상보다는 영화나 도시 문명과 같은 것에서 많이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수미씨는 얼굴을 두번 봤는데 기억이 흐릿해. 어떻게 생겼지… 사진을 안찍어 두었더니 얼굴이 생각이 안나네. 다음에 만나면 사진을 찍어 두어야지.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구별이 안 되지만 어릴 적 두 길 되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제 옷자락을 거머쥐는 나무도 없었답니다.
다만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해서리 아직까지도 꿈인지 생시인지 헛갈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두세 길 정도되는 절벽에서 물로 뛰어내리는 것이 놀이였죠.
고향에 가보니 그때 제가 뛰어내리던 깊은 물은 자갈이 밀려내려와 다 메워버렸더군요.
비명 대신 야호 소리를 질렀으니 제 고향 낭떠러지엔 야호하는 우리들의 신나는 즐거움이 살았던 셈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