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시인과 걸개 그림, 그리고 한잎의 여자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2월 2일 서울예술대학 드라마센터
오규원 시인 1주기 추모제에서

명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초입,
서울예술대학 드라마센터 앞에
시인 오규원의 걸개 그림이 걸렸습니다.
아, 그림은 아니군요.
사진이었습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사진이지만
세월에 묵히다 보면 사진이 그림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 사진에선 그림의 느낌이 났어요.
시인의 미간 오른쪽 위, 그림을 팽팽하게 당긴 힘이 풀어지면서
시인의 얼굴에 비스듬히 주름이 집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주름이 일렁입니다.
시인은 주름을 펼 생각도 않고
자신의 얼굴 한 귀퉁이에서 파도처럼 일렁이게 내버려둡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파도가 일렁입니다.
그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폈다 합니다.

오규원 시인의 1주기 추모제 행사,
행사의 마지막,
한잎의 여자를 보았습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죠.
아, 한잎의 여자구나.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처음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가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되었지만
나중엔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였다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여자”가 되버린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말했죠.
–오규원,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시를 사랑해서 모였데.
그 뒤의 말이 남은 듯 했지만
입안까지 치밀어올라온 슬픔이 그만 나머지 말은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전에만 해도
난 시인의 언어가 시인의 안에서 솟는다고 생각했었는데
한잎의 여자를 보는 순간,
그건 한잎의 여자가 가져다준 언어란 걸 곧바로 알 수 있었죠.
그녀의 몸에서 한잎의 여자가 떠오르고,
그녀가 그 한잎의 여자를 시인에게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이런 젠장할,
한잎의 여자는 한잎의 여자가 있어서 비로소 가능했던 거였어요.
한잎의 여자를 쓰고 싶다면
한잎의 여자를 찾아야 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잎의 여자를 보았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

2008년 2월 2일의 저녁 시간,
나는 드라마 센터의 한 귀퉁이에 앉아
오규원 시인과 내내 함께 하다 왔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2월 2일 서울예술대학 드라마센터
오규원 시인 1주기 추모제에서

8 thoughts on “오규원 시인과 걸개 그림, 그리고 한잎의 여자

  1. 아…그렇군요. 한 잎의 여자를 보셨군요. 아..

    공지영씨가 그랬지요. 한 때 시인이 되고 싶었드랬는데, 시는 천재들의 영역이라서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었다고요. 저도 시를 읽으면 늘 감탄했기에 동감했어요. 그런데 만약 ‘한 잎의 여자’가 있다면 ‘시’가 태어날 수도 있을까요?

    PS. 그 사람에게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선물했어요. 남자에게 시집을 선물한 건 처음이예요. “내 얼굴에 똥을 싼 갈매기에게”를 재미있어 하기에, 기뻐서 그만^^

    1. 가끔 사람에 실망하면서도 사람이란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하고 있는 매그넘 전시회도 온통 한국 사람들 모습이잖아요. 제가 자주 가는 사진 사이트는 사람들이 사진을 평가를 하는데 top-rated 사진은 온통 사람 사진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끔 그 사이에 풍경 사진이 옹색하게 끼어들곤 하지요. 사람이란 참 놀라운 것 같아요.

      시집 선물 아주 좋지요. 저도 그녀에게 시집 선물을 받곤 했는데… 받으면 시집을 펼쳐서 시 한 편 읽어주고 이건 이러저러한 시야하고 주절주절 떠들곤 했었습니다.

  2.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여자인가요?
    그런 여자를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오늘은 입춘이랍니다.
    새봄에는 경사스런 일들로 가득하세요.

  3. 저 윗 사진 멋지다.
    주름진 얼굴에 살짝 미소띈 것 같은 얼굴, 두꺼운 안경 너머의 순수한 눈빛…
    아래 사진은 오규원님이 한 잎의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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