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월요일,
오후 늦게 서울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좁쌀처럼 작은 눈이 내리는 대로 쌓이기도 하고, 또 녹기도 한다.
얼기설기 평생 엮어온 마당의 넝쿨장미 가지 사이로 눈들이 쑥쑥 빠진다.
마당에 쌓이기도 하고, 또 녹기도 한다.
넝쿨장미는 가지 사이를 나뭇잎으로 채웠다가
겨울엔 그 사이를 비워놓는다.
넝쿨장미 가지 사이는 여름엔 나뭇잎이 가득하고
겨울엔 허공이 가득하다.
시인 오규원이 그랬었다.
가지 사이가 비었다가 아니라 가지 사이에 허공이 가득하다고.
시인은 빈 곳을 말로 채우려 한다.
나도 그렇게 해본다.
나뭇잎이 가득할 땐 빛도 마당으로 걸음을 들이지 못했는데
허공이 가득하자 빛이 허방으로 쑥빠져 마당까지 엉덩방아를 찢는다.
눈도 허방으로 발이 빠져 어이쿠 소리를 지른다.
골목과 거리엔 눈이 내리는데
넝쿨장미 가지 사이가 숭숭 비어있는 우리 집 마당에선
눈들의 발이 허방으로 쑥쑥 빠진다.
허공을 아무리 가득 채워두어도 빠지는 눈의 발을 잡아줄 수 없다.
가지 사이의 빈자리는 아무리 허공으로 가득 채워도
여전히 텅텅 비고 만다.
빈자리는 자꾸만 쓸쓸해진다.
언제쯤 저 빈자리를 허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2월 26일 화요일 아침,
마당의 넝쿨장미 가지 사이,
허공이 가득하던 자리에 눈이 가득했다.
아침 햇볕도 여기저기 하얗게 걸려있었다.
내 시선도 한참 그곳에 걸어두었다.
오후에 눈이 다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다시 허공이 그득해졌다.
오후엔 그곳에 아침의 기억을 한참 동안 걸어두었다.
내일쯤엔 올해 찾아올 나뭇잎의 푸른 한해를 그려보며
그 기대를 걸어둘 생각이다.
어느 하나, 허방으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12 thoughts on “눈과 빈 가지 사이”
황동규님의 산문집…’겨울노래’란 책…1980년에 샀던 책을 지난 겨울에 다시 읽었답니다…제가 밑줄 그었던 연필이 희미하게 자국나 있는데…그 자국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황동규님의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면서…고등학교 때 쓰셨다는 ‘즐거운편지’를 떠 올리며…지금 다시 책을 보면서…오랜 책이 주는 냄새가 참 좋네요~
즐거운 편지는 고등학교 때 썼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좋구…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도 좋구… 읽다 보면 사랑이란 누구의 배경이 되어 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새가 날아 가면 허공은 구멍이 됩니다란…
오규원님의 ‘허공과 구멍’이란 시가 생각 나네요^^
그 시를 따라 가면 세상은 모두 허공의 변신이 되어 버리죠.
참 놀라운 시인이예요.
허공은 비어있어 어지간해서 발견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런데도 허공의 변신으로 거듭나고 있는 세상을 발견하다니…
털보라 하시니…
저희 큰 아버님 생각이 나네요
털보이셨던…동국대 불교학자이신 서경수 교수세요~
저를 예뻐 하셔서 인도 다녀 오시면, 보리수 잎도 갖다 주셨죠
털보 중의 털보이셨는데요…ㅋ
평상시는 털보로 다니는데 가끔 변장을 할 때는 샥 밀기도 해요.
황 동규님의 성긴 눈이란 표현을 좋아하는데…
눈들의 발이 허방으로 빠진다는 표현이 그럴 듯 한데요^^
아마도 오규원님의 시 가운데 어느 한구절에서 가져온 것 같아요. 워낙 좋아하다 보니… 어느 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고… 황동규 시인도 제가 많이 좋아하죠.
오늘 순천만 용산에 올랏더니 바람이 얼마나 불던지……..
남쪽나라엔 눈 구경은 못하고 비만 내렸어요.
올라가는 용산 길이 질퍽해서 후우,,,
내려오는 길에 밍감도 꺾어오고…
(전라도 사투리인데 아실런지?)
중년의 남자분이 혼자 다니시면서 셔터를 누르시길래……..
제가 유심히 바라봤어요.
동원님 생각이 잠시……ㅋ
저는 턱에 난 수염 때문에 금방 구별이 되는데… 혹시 그분도 털보이시던가요. 그리고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녀요.
밍감? 이 기회에 하나 알아두게 가르쳐 주세요.
용산은 저도 올랐었죠. 것도 하루에 두번이나.
순천 가고 싶네요. 와온 해변의 붉은 함초들을 찍어오고 싶어요. 솔섬도 좀 가까이 가보고 싶고…
혹시 그 밍감이란게 청미래덩굴이란 거 아닌가요? 빨간 열매가 달리는. 맛은 약간 달콤새콤하고…
눈오는날 나무가지에 눈꽃이 생각나네요~
눈오는 날 강원도가면 정말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눈꽃을 볼 수 있어요. 산에 올라가는게 좀 힘들어서 그게 좀 그렇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