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가본 사람은 알리라.
늦게 가면 안내인의 도움을 빌려야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이 없다면 대충 아무 자리에 앉아도 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영화라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속 편하다.
괜히 아무 자리에 앉았다가는 낭인처럼 이 자리 저 자리 떠돌 수 있다.
시인 김이듬을 따라 우리도 간만에 영화관에 한번 들어가보자.
하지만 아무데나 앉지 말고 「지정석」에 앉도록 하자.
그 「지정석」은 하나로 이어진 시이지만
난 그걸 나누어서 앉아본다.
손전등을 비춘다 안내인이 불빛으로 가리키는 좌석에서 웅크린 사냥개의 송곳니가 번쩍인다 나는 시커멓고 매끄러운 계단을 더듬어 올라간다 보르조이인지 그레이하운드인지 모를 개의 주둥이를 잡고 힘껏 벌린다…
“웅크린 사냥개의 송곳니”라는 말에 당혹스러워 하지 말자.
아무래도 좌석 번호를 그렇게 얘기한 듯하다.
보르조이나 그레이하운드 모두 개의 품종이다.
보르조이는 사냥개가 분명한 것 같고,
그레이하운드는 경주견으로 많이 쓰이지만
예전에는 사냥개로 쓰였다는 것 같다.
어쨌거나 영화관의 의자들은 대부분 다 하나같이 접혀 있다.
우리는 그것을 펼치고 앉아야 한다.
시인의 눈엔 영화관의 의자가 사냥개로 보였나 보다.
접혀있는 의자는 주둥이를 꽉 다물고 있는 상태.
왜 그렇게 보였을까.
그건 시인한테 물어봐야 알 것 같다.
물론 짐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연극도 예술성보다 돈에 목을 매야하는 세상이니
극장의 의자 또한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꼬여들어
돈을 뜯어내려는 사냥개로 보였음직하다.
그걸 사냥개로 보니까 의자를 펼치고 앉는게 아니라
“개의 주둥이”를 벌리고 앉는 게 되어 버린다.
…재빨리 방석만 한 혓바닥 위로 엉덩이를 밀어 넣는다 축축한 입김으로 데워질 때 나는 꽉 끼는 허벅지가 불편하다…
의자의 앉은 부분이 사냥개의 혓바닥이 되었다.
사실은 우리 엉덩이의 체온으로 의자를 따뜻하게 덥히는 것이지만
사냥개라는 상상을 밀고 나가면
그건 사냥개의 “축축한 입김”으로 데워진다는 게 맞는 말이 된다.
허벅지가 꽉 낀다는 것으로 보아 의자가 좀 좁았나 보다.
의자에 제대로 물렸다.
…피 묻은 의자에 맞춰 살점이 뜯겨나가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또 “피 묻은 의자”에 당황할 것 같다.
대부분의 영화관 의자는 빨간색이다.
그러고 보니 빨간색이 아닌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살점이 뜯겨나”간다는 얘기에 대해서도 당황하지 말자.
엉덩이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리라.
의자를 사냥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사냥개가 입속으로 들이민 엉덩이를 그만 내버려 두겠는가.
한번 시작한 상상인데 이제는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오른쪽 옆 좌석에서 어깨를 친다 벽난로 아궁이에서 얼굴만 내민 남자가 구두 좀 치워달라고 부탁한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 머리만 한 꽃들이 떠 밀려온다 오렌지색 머리칼의 여자가 꽃다발을 높이 들고 숨을 헐떡이며 나의 왼쪽 옆 자리로 기어오른다 역한 냄새가 나는 꽃이 내 코에 멧비둘기처럼 앉는다 양쪽에 위치한 여자와 남자는 나를 넘어서 대화를 시작하고 육구 형태로 포옹한다 나는 뭉개졌으며 개의 뱃속에서 조금씩 졸린다 누가 보낸 초대권이었는지 언제 연극이 시작될 것인지 아님 끝난 지 오래된 건지 생각하기조차 귀찮아진다
—김이듬, 「지정석」 이상 전문
“벽난로 아궁이”는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벽난로 아궁이처럼 주변이 어둡다고 편하게 생각하자.
그러니까 벽난로 아궁이는 시커먼 어둠 정도로 치환할 수 있겠다.
그러면 “벽난로 아궁이에서 얼굴만 내민 남자”는
벽난로 아궁이처럼 시커먼 어둠 속에서 얼굴만 보이는 남자로 이해가 된다.
사람들은 좀 의아해 질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쉽게 쓸 것이지, 왜 그렇게 당혹스럽게 쓰는 것일까.
그러나 “벽난로 아궁이에서 얼굴만 내민 남자”와
벽난로 아궁이처럼 시커먼 어둠 속에서 얼굴만 보이는 남자를
한번 비교해 보시라.
후자의 설명은 쉽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느낌의 긴장이 뚝 떨어져 버린다.
시는 언어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문학의 장르이다.
시를 그렇게 쉽고 이해하기 편하게 쓰는 것은
어찌보면 시를 포기하는 짓일 수 있다.
시인들 각자가 갖춘 언어의 긴장감을 나름대로 즐길 때 시를 읽는 맛이 난다.
음식에도 제 맛이 있듯이 각각의 시도 제 맛이 있다.
시는 그 각각의 맛을 살려서 읽는게 좋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특히
그들의 시가 지닌 그 특유의 맛을 살려서 읽어야 한다.
다시 시로 돌아가보자.
시인은 어둠 속에서 얼굴만 내민 남자가 “구두 좀 치워달라고”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다리 좀 치워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구두를 치워달라고 했다고 기억할까.
현대란 그렇다.
다리보다 사람들이 신고 있는 구두, 즉 부분으로 우리가 대변되는 시대이다.
발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게 아니라 구두가 발을 데리고 다닌다.
아무튼 시인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안쪽으로 들어가려는지 다리를 좀 치워달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 중의 한 여자가 꽃을 들었나 보다.
여자는 꽃을 들고 지나갔겠지만 시인은 그 꽃이 떠밀려 가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한다.
남녀는 시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앉았나 보다.
시인도 그렇지.
둘이 같이 앉도록 자리좀 내주지, 아무래도 자기 자리에서 그냥 버텼나 보다.
그 두 남녀가 시인을 사이에 두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나 보다.
시인은 그 둘이 포옹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하긴 둘 사이에 끼인 그 불편을 생각하면 생각이 그렇게 번질만도 하다.
처음에 나는 안내원이 불을 비추어 주었다는 얘기에서
시인이 들어간 곳이 영화관이려니 했다.
내 경험을 더듬어 보면
연극은 시작하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영화가 아니라 초대권으로 연극을 보러온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건 연극이 아니다 싶다.
우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좀 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쌍들을 보면
이것들 지금 연극하는 거야, 뭐야.
그건 이것들 지금 영화찍고 있는 거야, 뭐야와 같은 맥락이다.
시인은 영화보다는 연극하는 거야, 뭐야로 기운게 아닌가 싶다.
시인은 그 둘의 연극이 영 불편하다.
둘이 지금 막 무슨 짓거리를 시작할 사이인지,
잠깐의 짓거리는 그것으로 끝내고
영화보는 동안 아무 짓거리 없이 조용히 있을 것인지 생각하기도 귀찮다.
난 지정석에 들어가 앉은 시인의 처지를 그렇게 읽었다.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진다.
다음에 영화관에 가시거든
지정석에 앉도록 되어 있더라도 자리 남는다면
부디 아무 곳에나 앉으시라.
할 수 없이 지정석에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년놈들이 들어와 자신을 사이에 끼워놓고 양쪽으로 앉는다면
정신건강에 해로우니 부디 두 사람 사이에서 버티지 말고
그 둘을 한 자리로 몰아주시라.
시인처럼 버텼다가는 아무 것도 생각하기 귀찮은 무력증의 낭패를 겪는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
이제 다음에 영화관에 가시거든 한가지만은 꼭 한번 해보시라.
그건 바로 의자를 펼치고 앉는게 아니라
사냥개의 입을 벌리고 엉덩이로 깔아뭉개는 것.
영화관에 가면 사냥개 입을 벌리고 엉덩이로 깔아뭉개는 재미를 누릴 수 있나니
부디 그 재미를 지나치지 마시길.
또 가끔 엉덩이를 흔들어
사냥개 녀석의 숨이 턱에 차도록 장난치는 재미도 놓치지 마시길.
영화관에 가면 재미가 스크린에만 있는게 아니라 엉덩이 밑에도 있나니
부디, 앞으로, 밑으로 모든 재미를 누리시길.
(김이듬, 『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사, 2007)
7 thoughts on “다음에 영화관에 가시거든 – 김이듬의 시 「지정석」”
살포시 앉아도
제 엉덩이가 커서
뭉개는것으로 비칠듯….^^
제 엉덩이는 한입에 쏘옥 집어넣더군요.^^
키가 좀 큰 남자랑 영화관에 갔다.
좌석이 불편했던지 그 남자는 자꾸 다리를 움직였다.
움직일때마다 앞좌석의 등받이를 건들었나 보다.
앞남자가 화를 냈다.
같이 간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 남자더러 따라 오라고 했다.
밖에 나가서 둘이 옥신각신 주먹이라도 날아다닐 태세였는데
다행히 주먹다짐은 없었다.
앞좌석의 두 사람은 영화보다 말고 갔고, 우리 둘은 다시 들어와 끝까지 봤다.
아하~
같이 간 남자가 캐나다 교포였음을 실감했다.
그 이후로……
난 내 폰에서 그 남자 번호를 지워버렸다.
상황종료^^
실제 상황 맞는 거예요?
난 처음엔 무슨 반전의 유머가 나오나 했어요.
저의 영화관 얘기는 이렇게 나가는데…
혼자 영화관에 갔다.
맨 가장자리에 앉았다.
안쪽으로 여자 몇명이 앉았다.
중간에 화장실이 급했는지 몇이 밖으로 나간다.
그 중의 하나가 내 발을 밟았다.
사과도 안하고 그냥 나간다.
나중에 들어와선 내 자리로 더듬거리며 오더니 묻는다.
“저 혹시 아까 제가 발 밟지 않았어요?”
사과하려나 보고 그렇다고 했다.
그 여자 왈: “야, 여기 우리 자리 맞다.”
시들이 당혹스러울 때가 많지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더더욱 그래요.
읽으면 머리 속이 맑아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 질 때가 많지요.
난 종종 술취한 듯 그 젊은 시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어요.
같이 비틀거리면서…^^
재미있습니다.
시도 시의 해설도…
영화관, 컴컴한 영화관에서 분위기 잡고 영화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도통 없네요… ㅎㅎ
사냥개의 입을 좌아악 벌리고 엉덩이로 깔아 뭉개 듯 앉아서
영화 감상이나 해 보았으면…
사막 같은 더운 바람이 이는 곳에서 영화는 한갓 꿈이런가….
요즘 젊은 시인들은 아주 난해하고 당혹스런 시들을 종종 선을 보여요.
그 중의 한 사람인 김민정이란 시인은 한 인터뷰를 보니 왜 그런 시를 쓰냐는 질문에 “모두가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느냐”고 재미난 답을 내놓더군요.
생각들이 아주 자유로운 것 같아요.
가끔 나도 그들처럼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부러움 같은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