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빛 2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5월 14일 안양 학의천에서


저녁 그늘이 풀밭을 덮고 있었다.
그늘이 덮이면 풀밭은 몸이 무거워지고,
몸이 무거워지면 한층 색이 진해진다.
그 그늘이 완연해진 냇가의 풀밭 위로
저녁빛 한줄기가 내려왔다.
빛은 풀숲으로 몸을 들이밀어
투명한 푸른 빛으로 풀과 포옹했다.
푸른 포옹이 반짝거린다.
그 투명한 푸른 빛만으로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 푸른 포옹에선 헤어지기 싫은 진한 아쉬움이 만져진다.
왜 빛과 풀의 저녁 포옹에선 아쉬움이 동시에 만져지는 것일까.
고개 들어 보니 냇가는 온통 아파트와 높은 건물들의 숲이다.
저녁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아파트와 건물들은 저녁빛을 가로막고 서서
풀과 저녁빛의 작별을 독촉한다.
이 푸른 포옹의 저녁빛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파트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저녁빛이 냇가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파트가 없던 옛시절,
아직 저녁빛과 풀의 하루는 더 오래고 길게 남아있었으리라.
아파트가 생기면서 그들의 푸른 저녁 포옹은 크게 짧아졌음이 분명하다.
푸른 포옹은 아름답지만
가로막힌 포옹은 동시에 진한 아쉬움이 된다.
도시의 저녁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진한 아쉬움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5월 14일 안양 학의천에서

6 thoughts on “저녁빛 2

  1. 저는 좀전에 과일이 떨어져서 마트 다녀오는데
    딸아이가 달이 예쁘다고 보라해서 봤더니 완전 황금색 달인거있죠.^^
    진짜 예뻤어요 황금색 보름달.

    1. 이젠 카메라 가지셨으니 찍어 올려주셔도 되는데…
      달을 찍을 때는 달에 초점을 맞추고 spot 측광을 한 뒤에 밝기를 2 stop 어둡게 하고 찍으면 아주 달만 선명하게 잘 나온답니다. 노출 편차, 그러니까 exposure bias라는 것을 조절하는게 있는게 그걸 두 단계 낮추는 거죠. 이렇게 찍지 않으면 달이 허옇게 나와 버려요.
      사진도 참 공부할 게 많은 분야죠.

  2. 저두 얼핏 보리밭인줄 알았어요.
    아파트며 빌딩이며 사람들이 만든 것이 높아지고 멋져질수록 자연과 자연이 포옹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요.

    1. 이날 저녁빛에 관해서 두 가지 느낌을 받았어요.
      하나는 위에 쓴 거고, 또다른 하나는 저녁빛이 아파트 모서리에 부딪쳐서 빛을 내고 있는 장면이었죠. 저녁 때마다 햇볕이 아파트 모서리를 들이받고 머리가 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냇물가에서 그거보며 키득키득 웃었다는…ㅋㅋ

  3. 한 줄기 빛이 색을 갈라 놓았네요.
    잡초밭인거 같은데 보리밭같은 분위기가 나네요.
    저녁빛 한줄기 덕분에…

    1. 완전 잡초밭이예요.
      이제 봄꽃은 지고 아직 여름꽃들은 나오질 않고 있는 상황이라 이 날은 주로 어렵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과 그 빛으로 투명해진 잎들을 쫓아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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