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언의 시는 대체로 혼란스럽다. 시의 흐름이 매끄럽게 잡히질 않고, 이미지가 투명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한 번 읽어선 시의 메시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몇 번 읽는다고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읽을 때마다 시인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머리 속에서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몇 번을 읽고 나도 여전히 머리 속은 어지럽게 엉클어져 버린다.
가령 김언은 이번 신작시의 어느 부분에서 인가 “비 오는 눈이 내리고”라는 말을 한다. 무슨 소리일까? 비오듯 눈이 내린다는 뜻일까. 비가 오면서 동시에 눈도 내리고 있다는 뜻일까. 마치 “비 오는”으로 시작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난 듯 “눈이 내리고”로 말을 바꾸어 또다른 말을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부분에 부딪치면 우리는 그 혼란스러움 때문에 그간에 타고 왔던 흐름을 놓치고 만다. 그의 시는 종종 중간쯤에서 이런 식으로 삐끗거린다. 그렇게 한번 삐끗거리면 시의 흐름이 완전히 뭉개져 버린다.
이런 혼란을 빈번하게 겪다 보니 혹시 그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의심이 맞다면 그는 왜 나를 그런 혼란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것일까. 나를 그런 혼란 속으로 밀어넣어 그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2
나는 아주 명확하게 잘 정리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우리집 문앞으로 배달된 신문은 그날그날의 사건과 사고를 잘 요약하고 정리하여 내게 내민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세상을 한눈에 일목요연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좀 오래된 옛날 일들은 역사책이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도 그 시작에서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내가 그 전쟁의 시작과 끝을 들여다 보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태양과 달과 별의 비밀도 명확하게 해명을 해준다. 그 해명은 과학자들이 도맡는다. ‘과학자’들은 “불필요한 수식을 제거”하여 실제로는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죽어 가고 있는 것임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법정에서의 갈등도 변호인과 판사가 명확하게 정리해준다. 나는 그렇게 명확하게 잘 정리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김언의 손을 잡고 그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보면 그렇질 않다. 그는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없다」는 시의 첫머리를 이렇게 떼고 있다.
이보다 명확한 사건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우리는 그가 마치 어떤 사건의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실은 사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전하는 기록, 그의 말을 빌자면 문장 앞에 서 있다. 즉 그는 실제 사건의 현장이 아니라 문장이 재단하고 규제한 사건의 서술 앞에 서 있다. 그래서 김언은 이렇게 말한다.
사건 다음에 문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 어떤 문장은 매우 예지적이다.
어떤 문장은 매우 불길하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자신의 말에 일말의 책임을 진다. 그것은 조금 더 불행해졌다.
우리가 사건을 직접 목도한 기록자가 아닌한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입장 또한 그런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건의 기록을 사건과 동일시한다. 사건은 그렇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사건은 그렇게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실제 세상의 모든 사건은 문장으로 요약되며, 우리는 대개의 경우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요약된 문장 앞에 선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큰 혼동은 없다. 우리는 사건과 그 사건을 서술하고 있는 문장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사건이 문장이고, 문장이 곧 사건이다. 그 둘은 굳게 결합되어 있다.
김언의 시가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가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기술한 문장이란 것을 환기시키면서 둘 사이의 굳건한 결합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문장을 마주하면 그것이 문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그것을 사건 자체로 착각하면서 문장에 몰입한다. 가령 “총은 여전히 장전 중이다”라는 문장이라면, 그러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이 발사되었다는 문장이 그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별 혼란없이 그 문장을 따라간다. 그러나 김언은 그 문장의 뒤에서 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이 발사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탕, 하고 문장을 시작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문장임을 환기시킨다. 그 환기는 문장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해는 끊임없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런 식의 방해만으로도 그의 시를 읽는 작업을 상당히 걸끄러워 진다. 그런데 그는 이런 방해에 그치지 않고 간혹 한참 동안 생각을 더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가령 그는 “시신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화장하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혼란에 처한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면 오히려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화장을 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을 화장한 뒤 그 재를 담은 유골함의 이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유골함의 그 이름은 화장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일러준다. 그러나 우리는 화장이라는 말을 접하면 한줌의 재를 연상한다. 재가 되면 그때부터는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유골함에 새겨진 이름은 그 재의 주인을 분명하게 해준다. 우리가 재를 생각할 때, 김언은 유골함에 새겨진 사람 이름에 시선을 준다. 말하자면 그는 화장이란 말을 통하여 우리의 시선을 한줌의 재쪽으로 몰아놓으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운다. 그 어긋난 시선의 각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문장을 매끄럽게 따라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유추할 때까지 이 부분에서 한참 동안 발목이 잡혀 있었다.
도대체 왜 그는 우리가 그의 시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일까. “말이 사건을 제압”하는 세상에선 그 말이 규정하는 경계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사실 세상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 그 말의 경계 내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 안에 갇혀있을 때 말은 그 경계 내의 말을 소유한 자들의 몫일 뿐이다. 그 경계 바깥의 나머지 사람들 대부분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즉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세상을 명확하게 재단하고 요약하는 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런 말에 몰입을 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말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시의 말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시의 말은 그 말들의 경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을 그 경계 바깥으로 끌어내려 한다. 김언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말이 사건을 규제하는 것 같지만 말은 반대로 상황, 즉 세상의 규제를 받기도 한다. 「인터뷰」에선 그러한 반대의 상황이 나타난다. 시속의 ‘나’는 “이 도시를 경영하는 자를 만”나고 돌아와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그는 “내가 쓰는 문장이 어렵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고, 그 생각은 “이러면 독자들이 힘들어” 하거나 “아니면 무관심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쉽게 씁시다”는 “잡지 편집자가 보내온 충고성 발언”이 그런 생각에 중압감을 더한다. 그 결과는 이렇게 나타난다.
…나는 내 밥줄을 탐내는 일부 동료들의 질투 어린 시선도 따갑게 느끼면서 어차피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면 편집자의 충고가 고맙다는 생각도 슬쩍 끼워서 답신을 보냅니다. 편집자에게는 편집자의 시간이 있고 동료들에게는 동료들의 시간이 있으며 잡문을 쓰는 시인에게는 부족하나마 잡문의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이보다 명확한 이유를 본 적이 없다」에선 문장이 사건을 규제하고 있었지만 「인터뷰」에선 상황이 글을 규제한다. 김언은 이렇게 글이 상황의 규제를 받을 때, “시에서 조금 멀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미 경험했지만 그의 글이 시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그의 시 앞에서 혼란스러워진다. 시인은 사람들의 혼란을 불안으로 대치하여 이해한다. 그의 시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의 불안, 즉 혼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이 반복된다고 더 불안할 이유가 없겠지만, 내 문장이 불안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충고는 이상하게 불안합니다. 저들이 못마땅한 이유와 내가 불안한 이유가 왜 이렇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걸까요? 그들이 고민하는 시와 내가 고민하는 시가 왜 다른 무대에서 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래서 문장이 사건을 규제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이 글을 규제할 때도 그의 시는 마찬가지로 혼란스럽다. 그는 그런 규제의 바깥에 시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규제의 경계를 벗어나면 어느 경우에나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는 소설도 주인공에 대한 일종의 규제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시에 비하여 소설이 일정한 서술적 이야기 구조를 갖추면서 훨씬 더 강력한 현실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슬쩍 빼내 자신의 시 속으로 데려온다. 보통은 다른 소설가의 소설을 시의 매개로 삼을 경우 그러한 시는 소설의 내용이나 등장 인물에 대한 시인의 느낌이 되겠지만 문장의 규제와 상황의 규제에 대한 반발이란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김언의 경우에 그러한 시는 소설의 이야기가 규제하는 공간에서 주인공을 빼내는 행위에 가까워진다. 소설의 등장인물 카가 “카 자신의 소멸을 암시하면서/거부하는 주인공의 말투를 흉내”내고 있는 시 「카의 주인공들」은 내가 보기엔 소설의 이야기가 규제하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도록 시인이 배려한 공간이다. 쓰여진 모든 것들은 일정한 규제 아래 놓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시는 그 규제의 너머를 꿈꾼다.
그렇다면 쓰여진 것을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차적 서술자일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즉 그가 상황을 마주하고 기록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의 예를 「내 호주머니에 둥지를 튼 굴뚝새의 겨울」에서 들여다 보자. 나는 이 시를 광장이 있는 한 마을과 그 광장에 서 있는 나무 한그루, 그리고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 그곳을 들락거리는 굴뚝새가 있는 풍경으로 이해를 했다.
그렇다고 시가 전체적으로 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를 전체적인 어떤 흐름 속에서 해명하려고 들면 오히려 읽을수록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 진다. “비 오는 눈이 내리고”라는 구절이 그렇고, 그 뒤에 이어진 “누군가 받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는 구절도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 받으라고 전화를 건다. 그런데 김언은 누군가 받기 위해서 전화를 건다고 말한다. “누군가 받기 위해서”와 “전화를 걸었다”는 그의 시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지만 한 흐름으로 조화롭게 엮이지 못하며 오히려 충돌한다. “비 오는 눈이 내리고”도 마찬가지이다. “비 오는”과 “눈이 내리고”는 서로 이어져 있지만 그 둘은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도 한자리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언이 전통적인 시적 묘사에서 부족함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장면을 말하고 있는 “무성하게 자란 굴뚝새의 잎사귀들이/집을 비우고 날아갔다”는 묘사나 광장에 눈이 쌓여있는 풍경을 말하고 있는 “이 마을의 광장이 하얗게 하얗게 목소리를 털어서/고백하고 있다”는 묘사로 보면 그는 서정적 묘사에 매우 뛰어나다. 그렇지만 그런 묘사는 그의 시에서 마치 옹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결국 이 혼란 앞에서 나는 그도 혹시 혼란에 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즉 “비 오는 눈이 내리고”는 비 오듯 눈이 내리는 것인지, 비가 오면서 동시에 눈이 오고 있는 것인지, 그도 혼란에 처했고, 그 혼란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 이른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그 혼란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밖에는 그 혼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누군가 받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도 그렇게 이해를 했다. 누군가의 전화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전화는 오질 않는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그 사람은 전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때 전화를 거는 행위는 사실은 걸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받고 싶은 욕망의 극대치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결합하려면 혼란을 무릅쓰고 “누군가 받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보이는 혼란이나 난해함은 그간의 시적 표현이 갖고 있던 상투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은 그의 시를 어렵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제도에 잘 적응하여 자리를 잡은 나이든 사람들은 더더욱 불만이 크지 않을까. 이게, 뭐야, 시야?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시인은 그런 불만에 대한 대비 정도는 해두지 않을까 싶다. 간단하게 보자면 시 「인터뷰」 속에 들어있는 “그들이 고민하는 시와 내가 고민하는 시가 왜 다른 무대에서 살면 안 되는 걸까요?”라는 반문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다르게 진화해갈 겁니다”라는 말은 그의 시적 스타일에 대한 그의 의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갖게 된 불만, 즉 시가 어렵고 혼란스럽다는 것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은 그의 시 「미래」에서 읽혔다. 김언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에 비해 과거는 많이 엄숙해졌고 진지해졌으며
그래서 문제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라고. 원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 그런데 이 문장에선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과거는 원래 변화가 완료된 시점일텐데 그 과거가 엄숙해지고, 진지해지면서 변화가 과거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미래에 서서 과거로 시선을 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반대의 흐름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은 비디오를 역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역방향으로 돌리면 물이 수도꼭지를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로 빨려올라간다. 당연히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역방향의 흐름이 역방향으로 흐르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가령 잔잔한 잔물결의 영상이라면 그것은 바로 돌리나 역방향으로 돌리나 거의 똑같아 보인다.
김언은 마치 그런 자연스런 상황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미래에서 과거로 뒤집어 버린다. 그것도 미래에 서서 시간을 뒤집는다.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뒤집으면 현재가 과거가 된다. 즉 현재가 모두 과거 속으로 밀려난다. 그러자 그 역방향으로 만난 과거, 즉 오늘의 현재는 “하나같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시인은 말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라고.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은 원래 과거로 현재를 규제하려는 의도를 품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예전은 미래이다. 때문에 여기서의 이 말은 미래로 과거를 규제하려는 의도를 품은 말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혼란스럽고 너무 난해하다는 나의 불만에 대해 그건 내가 과거의 시적 양식에 붙잡혀 있어 너무 고리타분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대응을 하면 그것이 상투적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그 방법 대신 시간을 거꾸로 뒤집어 나를 과거 속으로 몰아넣고 내가 과거로 미래를 규제하려고 했던 그 말로 오히려 나를 규제하려 든다. 내가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에 그대로 내가 당하니 나는 할 말이 없다. 결국 그 맹랑함에 나는 두손두발 다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그렇게 졸지에 과거로 내몰린 현재를 경험한 것은 재미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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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다기 보다 문장의 규제나 상황의 규제, 또는 이야기의 규제에 대한 반발에 가깝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그런 반발에서 더 나아가 그 자체로서 어떤 완결성을 갖는 새로운 시적 세계를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 모색의 실마리를 본 것은 「그 곡은 딱 한 한번 연주되었다」에서 이다.
그 곡은 딱 한 번 연주되었다
베를린에서, 빈에서, 그리고 런던에서
음악이 가능한 거의 모든 도시에서
딱 한 번 연주되고 사라졌다
음악은 연주되고 나면 사라진다. 악보라는 규제가 있지만 그러나 음악은 연주되면서 악보의 규제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악보의 규제를 넘어선다. 음악이 악보의 규제를 받는다면 연주는 항상 똑같을 텐데 연주는 항상 다르다.
김언의 꿈도 마찬가지이다. 시 또한 규제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는 순간 말이 사라져버리는” 세상을 꿈꾼다. 말의 규제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그 규제를 넘어서는 또다른 말의 세상이다. 그는 음악에서 그것의 전형을 본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선 어떻게 나타날지 나는 짐작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루는 건 내 몫이 아니라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들을 차근차근 읽어봐야 겠다.
(『현대시』, 2007년 3월호)
4 thoughts on “음악같이 연주될 시를 꿈꾸다 ─ 김언의 신작시 여섯 편”
이 글 막 올리셨을 때 읽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나갔더랬어요.
차분하게 다시 읽어봐요.
가끔 글이 잘 안 써지고 생각이 멍하게 한 길로만 가고 있을 때는 동원님의 시평을 읽어보는 게 상당이 도움이 돼요. 생각과 말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거든요.
조중동 등의 보수언론이 우리 시대 사건을 왜곡하고 좌지우지 하는 것, 문장이 사건에 앞선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에 공감 한 표예요.
사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너무 어려워요.
그런데 그런 시들을 읽다가 전통적인 양식의 시를 읽으면 그때는 또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요일마다 시읽기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일 때문에 바빠서 올리질 못하고 있어요. 이번엔 실연당했을 때 해먹는 프라이 요리라는 재미난 시읽기를 올려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하고 있는 일이 끝나야 가능할 거 같아요.
조중동의 논리는 너무 교묘해서 큰일이예요. 그럴듯해 보이거든요. 조중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도대체 뭐가 잘못된거지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니까요. 항상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다듬고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한겨레나 경향과 같은 정반대쪽 견해가 많이 도움이 되지요. 시인은 어떻게 보면 근원적 차원에서 조중동은 물론이고 모든 언론이나 이념적 책들이 필연적으로 갖게 될 현실 왜곡에 맞선다고 봐야죠. 저는 그런 근원적 저항의 시편들이 좋더라구요.
사건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었네요.
시인은 촛불집회 생중계 같은 언어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해 봅니다.
시가 개인적 차원의 노래일 때도 있고, 사회적 차원의 노래일 때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 차원의 노래도 사회적 차원의 노래로 해석해서 보곤 합니다. 문장 다음에 사건이 생긴다는 관찰은 사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의 문제를 생각하면 아주 의미있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