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 있다고 나의 존재감이 지워지진 않는다. 다들, 음, 곤히 주무시는 군 하면서 내 자는 모습을 지나칠 것이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잠들어 있다고 그녀의 존재감이 지워지진 않는다. 아니, 잠든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평상시에 없던 교감이 싹틀 때도 있다. 갑자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고, 그녀와 함께 떠났던 제주 여행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생시킨 그 동안의 세월이 겹쳐지면서 그녀에 대한 애틋함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깨어있을 때 무심하게 흘려보내던 존재감을 잠들어 있는 존재가 더욱 각인시킬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잠들어 있다고 존재감이 지워지진 않는다.
그러나 잠들면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이 있다. 바로 바람이다. 바람이 잠들면 사람들은 그때부터 바람이 없다고 말한다. 바람은 존재감을 가지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바람은 잠들면 그 존재감을 잃고 만다.
시인의 촉각이 예민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바람이 존재감을 잃은 그 순간, 시인은 그 자리에서 바람의 잠을 감지해낸다. 바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에 드는 것이다. 아니, 아니다. 시인은 그에서 더 나아간다. 그 자리엔 사나운 짐승 하나가 갇혀 있다. 그리하여 시인 조용미는 “어둑한 날” “나무들”에서 “그들의 손에 온순하게 갇혀 있는” “사나운 짐승” 하나를 본다. 그게 바로 바람이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 귀가 되어
한곳을 향하고 있다
키 큰 나무들,
오동나무와 대나무와 뾰족하고 잎사귀가 많은
비파나무들, 어둑한 날
그들의 손에 온순하게 갇혀 있는
그토록 사나운 짐승인
바람은
사각사각 내려앉고 있는
달빛 물어뜯으려
숨을 고르고 있지
나무 사이에, 나뭇잎 사이에
보이지 않는 짐승
—조용미, 「나무 사이에 소리가 있다」 전문
숲에 가면 바람이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바람이 없으면 숲은 적막하다. 숲의 소리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람 소리이다. 바람이 있으면 숲은 소리로 넘친다. 바람이 불 때 잎들의 재잘대는 수다는 보통을 넘는다. 물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수다이다. 그러나 바람이 없으면 숲은 입을 다물고 적막으로 빠져든다. 날이 어둑할 때는 더더욱 그 적막의 느낌이 깊다. 시인의 앞에 서 있는 나무에도 바람 한점이 없었나 보다. “나뭇잎 하나하나가/다 귀가 되어/한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람은 없고, 그 때문에 아주 적막이 깊었지 않나 싶다. 소리가 분명하면 우리는 귀를 모으지 않는다. 우리는 소리가 작고 미세할 때 귀를 모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으로 미루어보면 우리의 귀엔 소리가 없는 것이지만 그런데도 시인은 소리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소리가 없는데 나뭇잎들이 한곳으로 귀를 모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리라. 그래서 날이 어둑한 시간, 적막이 내려앉은 숲의 나무 사이에 선 시인은 오히려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 사이의 적막을 작고 미세한 소리로 채우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바람 하나 없는 숲의 현실에도 그대로 파급되어 결국은 바람에게까지 번져나간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바람이 없다는 표현은 바람의 존재감을 지워버린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바람이 잠잔다고 표현을 해도 그 표현은 그저 바람의 존재감을 살려주는데 그칠 뿐 그 표현 아래선 바람과 숲이 서로 따로 놀게 된다. 시인은 그 두 시각을 모두 버린다. 시인의 눈엔 바람이 숲에 갇혀 있다.
바람이 숲에 갇혀있다는 시각은 바람 한점 없는 숲을 거닐 때 그 걸음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안에도 우리가 가두어 놓은 바람이 갇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러한 시각에 편승하면 우리는 숲을 거닐면서 동시에 우리 속을 거닐 수 있다. “나무 사이” 또는 “나뭇잎 사이”에 “보이지 않는 짐승” 한 마리가 갇혀 있듯이 우리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짐승이 갇혀 있을 수 있다. 바로 바람이다. 조용미의 경우, 나무 사이에 갇힌 그 짐승은 나뭇잎에 “사각사각 내려앉고 있는/달빛”을 물어뜯으려 “숨을 고르고 있”다. 숨을 고르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람이 아주 약간씩 부드럽게 불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한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왜 바람은 달빛을 물어뜯으려 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거세게 일어나 숲을 뒤흔드는 강한 바람을 말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바람과 달리 잠들어도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그렇질 않다. 우리는 멀쩡하게 깨어서 부단히 움직이며 생활하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모두 지워진 듯한 상실감을 앓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잠들어도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깨어서 끊임없이 움직여도 존재감이 지워진 듯한 상실감을 앓게 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이다. 그러니 숲에 갇혀있는 바람은, 우리가 우리 안에 가두어놓은 바람이 아니라, 존재감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존재감을 잃고 마치 숲에 갇힌 바람처럼 살고 있다면, 문득 일어나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며 달빛이라도 물어뜯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조용미의 숲에서 처음에는 숲이 우리인 듯했으나 그 숲을 걷다 보면 그 숲에 갇힌 바람이 우리가 되고 만다.
이제 난 앞으로 숲에 가면 바람이 하나 없더라도 그 바람을 지우며 걷지는 않으리라. 달빛을 물어뜯으려 숨을 고르고 있는 바람에 긴장하며 어둑한 숲길을 걸어보리라. 그러면서 내 속을 걸어 그 숲의 짐승을 만나보리라. 그리고 그 짐승의 얼굴에서 나를 본 순간, 갇혀있던 내 속의 나를 풀어놓고,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며, 그때쯤 숲에 내린 달빛을 물어뜯어 보리라. 그렇게 바람이 자는 어둑한 숲길을 가면 우리는 우리 속을 거닐 수 있다. 그 숲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숲에 갇힌 바람을 만나고, 그 바람의 얼굴에서 갇힌 나를 보게 된다. 갇힌 나는 달빛이 뜰 때면 온순하게 길들여진 나를 버리고 거센 바람처럼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어둑한 날 숲에 가서 내 속을 거닐며 내 속의 짐승, 바로 그 바람을 깨우리라.
10 thoughts on “숲을, 아니 내 속을 거닐다 — 조용미의 시 「나무 사이에 소리가 있다」”
글속에서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훌륭한 시인이군요^^.
저랑 나이도 비슷해서 공감이 큰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시인들의 예지력은
놀라울 뿐입니다…..
조용미 시인은 특히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시를 쓰다보니 가끔 그 뒤를 따라 시인이 갔던 곳을 하나하나 찾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시집을 내기 전에 등단할 때의 작품이 “청어는 가시가 많아”라는 것이었는데 그때 기억을 해두었던 이름이었어요. 그러다 어느날 시집에 대한 리뷰를 부탁받고 아주 기분이 좋았었죠. 제게는 시가 먼저오고 그 다음에 글로 그 시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시인이었습니다. 제가 게으르다 보통 글을 쓰면서 알게 되는 시인들도 많거든요. 손가락에 꼽아둔 좋은 시인 가운데 한 명이죠.
숲…
울창한 숲 속에서 동물들을 마주 한다는 신비함
캐나다의 상징~무쓰가 제 앞에 서 있는데…
사진 못 찍은게 넘 아쉬워요
너무 밤색이어서 눈도 잘 보이지 않는데..가슴은 얼마나 뛰는지요
이번 여행의 선물이었죠
많은 동물들이 달 빛에 얼마나 나와서 뛰어 놀까요?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면서 대서양의 포효하는 바다의 바람을 느끼고요
바람이 너무 차가와서 덜덜 떨면서 숲 카페에서 맛 본 따뜻한 스프…추억이네요
다음 날 숲이 잔잔해지고…같은 곳을 다시 가보니 대서양도 온순해져 있었답니다
동원님이 멋지게 풀어 주시니..이 시와 더 교감이 되네요^^
시인들의 도움을 빌면
자연의 맛을 남다르게 즐길 수 있는 듯 싶어요.
원래 이 시를 먼저 읽고
오늘은 광릉숲에 가서 시에 맞는 사진을 하나 찍어갖고 오면
그것으로 숲에 간 걸음이 대만족이라고 생각하며 간 길이었어요.
생각처럼 시에 딱맞는 숲은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냥 중간 정도 만족스러웠지요.
좋은 여행 하신 것 부럽습니다.
간만에 나타난 긴글을 보고, 몇일간 나눠 읽었습니다.
음.. 생각해 보니, 몇일까지는 안될지 모르겠네요.
뭐…간만에 보인 긴글이라 아껴먹으려고 그런건 아니고,
먹고있는데 자꾸 테클이 들어와서 어쩔수 없이 쪼개 먹었습니다.
시를 이해한다는 게 이렇게 어렵군요.
동원님이 생각을 따라가니, <음.... 이런거였군>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다음부터 이렇게 이해볼 엄두는…. 솔직히 나질 않습니다.
단순한 박대리입니다. ^___^;
동원님의 글을 읽으면서,
지난밤에 거리에서본 나무에 있는 걸려있던 건, 바람이 아니라,
흔들리는 제 마음이 걸려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뒤늦게~ 입장료 납부하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__^;
시를 이해하시는게 아니라 시로 곧장 가시려는 것 같은데요…
자주 올려야 하는데 저도 시를 읽는게 쉽질 않아서 자주는 못 올리고 있어요.
들러주신 거 고마워요.
행복을 같이 나눠요.
짐승은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정말 짐승인 경우와 애교섞인 짐승. 보통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살아야 하는데 한쪽으로 치우치면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바람도 잘 알고 있어 때로는 사나운 짐승같이 때로는 보이지 않는 짐승으로 살고 있나 봅니다.
그 바람에 나까지 바람이 나면 절대 흔적을 남기면 안되겠지요. 흔적을 남기는 순간 바람 사이에 물어 뜯으려는 짐승이 있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어도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우리는 깨어있어도 존재감이 지워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보다 더 심각한 존재감의 상실을 앓을 때가 있는 게 우리들인 듯 싶습니다. 처음에는 왜 달빛을 물어뜯으려 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존재감이 지워지면 아무래도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며 일어서고 싶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댓글로 얘기 주고받으면서 제가 얻는게 많습니다. 조금 덧붙여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