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만 공연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현장이 곧 무대이고 그 현장의 삶이 곧 공연이다.
그녀는 특히 매달 말, “마감”이란 이름의 공연을 펼친다.
언듯보면 장면은 아주 단조롭다.
언제나 그녀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고, 끊임없이 마우스를 놀린다.
공연이라고 하기엔 지루하고 따분하다.
하지만 좋은 음악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선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가.
그 얘기를 반대로 뒤집으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장면도 사람의 눈에 따라선
얼마든지 경이롭게 보일 수 있다.
내겐 그녀의 공연이 언제나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녀가 펼치는 “마감” 공연의 무대에선 여러 소리가 뒤섞인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것은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이다.
가끔 위윙하는 그 컴퓨터의 팬소리는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때면 그 소리는
그녀의 공연 무대를 싣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듯한 몸부림 같기도 하다.
하긴 우리는 일이란 이름으로 컴퓨터 앞에 오래도록 묶이면
그때마다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곤 하다.
그렇게 하여 시끄럽게 돌아가는 컴퓨터의 팬소리는
공연의 무대를 떠나고픈 우리의 잠재된 욕망이 되기도 한다.
공연 무대의 소리는 주로 컴퓨터를 중심으로 보태진다.
따닥 따닥 따닥거리는 컴퓨터 자판 소리,
짤깍 짤깍 짤깍대는 마우스의 클릭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가끔 띵띵 거리는 컴퓨터의 경고음이 소리에 변화를 주곤 한다.
가끔 그녀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손을 놀린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2단 평행봉을 새처럼 나르며
우리의 눈을 경이롭게 했던 코마네치를 떠올리곤 한다.
숙련된 공연자만이 그런 동작을 취할 수 있다.
그녀의 손이 머뭇거림이 없이 가야할 곳을 찾아간다.
무엇을 눌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손끝에서 서체가 얼굴을 바꾼다.
글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크기를 바꾼다.
또 색깔이 끊임없이 색을 바꾸며
자기 자리에 어울리는 색을 찾으려 애쓴다.
그녀가 손을 놀릴 때마다 텍스트와 사진, 일러스트레이션이
마치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책의 한 쪽 한 쪽을 이루어간다.
그녀의 “마감” 공연은 언제나 그렇듯
책을 만드는 작업으로 그 내용을 채워간다.
그녀는 매달 말이면 “마감”이란 이름의 공연을 한다.
그녀가 “마감”이란 공연을 하는 동안
그녀의 옆에선 텔레비젼이 중얼중얼 거리며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쏟아낸다.
실제로 그녀의 텔레비젼은 옆에 놓인 또다른 컴퓨터의 모니터이지만
그녀가 마감 공연을 할 때면
컴퓨터 화면 대신 텔레비젼 프로그램으로 화면을 채우고
그녀의 옆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떠들고 앉아있는 엑스트라역을 맡는다.
사실 텔레비젼 앞에 앉으면
모두가 그 텔레비젼의 관객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마감” 공연을 펼칠 때면
텔레비젼은 전혀 그녀를 관객으로 삼지 못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의 공연 무대를 적막이 둘러싸면
그 적막이 졸음의 둥지가 된다는 것을.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텔레비젼은 드라마, 쇼, 스포츠 등등의 공연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그녀를 관객으로 그 앞에 꿇어앉히고 그녀의 시선을 앗아갔겠지만
그녀가 “마감” 공연을 펼칠 때면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녀의 공연 무대에서 텔레비젼은 이제 작은 소품으로 전락한다.
텔레비젼의 역할은 끊임없이 입을 놀려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그녀의 졸음을 쫓아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떠들석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떠들면
끄덕끄덕 졸립다가도 졸음이 달아나지 않던가.
텔레비젼은 그래서 그녀의 옆에서 그녀가 졸립지 않도록
계속 중얼중얼 거리며 무슨 얘기인가를 떠들어야 한다.
그게 그녀의 공연 무대에서 텔레비젼이 맡게 되는 주된 역할이다.
하지만 그녀가 텔레비젼을 아예 개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일하다 말고
잠깐씩 눈을 돌려 몇초 동안 텔레비젼을 보며 웃음을 조금씩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녀의 마감 공연 때 텔레비젼은 그렇게 잠깐씩 그 존재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텔레비젼은
보기에 딱할 정도로 무시를 당하는 입장이 된다.
그런데도 텔레비젼은 계속 중얼중얼거리며 입을 놀려
그녀의 졸음을 쫓아야 한다.
그녀의 공연 “마감”에선
항상 끊임없는 공연으로 우리들을 관객으로 주저 앉혔던 텔레비젼이
공연의 소품으로 한쪽 구석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녀의 공연에선 그녀의 삶이 공연이 되고
그동안 공연을 독차지했던 텔레비젼은 소품이 된다.
그녀의 공연 “마감”의 관객은 단 한 명,
바로 나 뿐이다.
이 달엔 일정이 겹치면서 많은 공연이 함께 진행되었다.
이번 달 그녀의 공연은 다른 때보다 좀더 길고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