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보인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가령 금반지가 눈앞에 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금반지의 금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금반지의 구멍은 쉽게 보질 못한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금반지의 구멍을 금과 함께 금반지의 본질적 요소로 보았다. 구멍이 없으면 금반지는 그냥 금 덩어리에 불과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금반지에서 구멍을 보기 어려운 것은 구멍이 빈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빈자리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무엇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거의 모든 대상에 대해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고 있다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나무와 떨어지는 잎에 모인다. 때문에 우리는 그 현상을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고 있다”로 읽어내게 된다. 거기서 좀더 나가보았자 “잎이 떨어진 자리가 비어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정도에서 그치고 만다. 이는 금반지가 눈앞에 있을 때 구멍은 보지 못하고 금만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눈앞에 무엇인가가 있으면 그것을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에서 시선이 막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현상 앞에서 막힌 시선을 좀더 확대하거나 넓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금반지에서 구멍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이 그 한 방법일 것이다. 오규원의 시 한 편은 그것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오규원, 「나무와 허공」 전문
이미 든 예에서 볼 수 있었듯이 같은 상황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들의 일반적인 시선 속엔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잡히며, 그 장면을 언어로 표현하면 ‘나무에서 잎이 떨어진다’로 옮겨진다.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장면은 누구나 한번쯤 접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흔하디 흔한 장면의 하나이다. 오규원은 이를 눈앞에 두고 나무에서 잎이 떨어진다는 일반적 시선을 비켜가면서 “잎이 가지를 떠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시적 표현의 하나가 아니겠냐고 말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표현의 변주가 아니라 나무에서 잎이 떨어질 때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마치 금반지에서 구멍을 보듯이.
그렇다면 시인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질 때 무엇을 본 것일까.
‘떠난다’는 말에선 이별의 느낌이 난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여기 이 시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떨어진다’라는 말에선 이별의 느낌이 나질 않는다. 떨어진다는 말에선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가 느껴진다. 똑같은 현상이 서로 다른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누군가는 나무에서 잎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나무가 잎을 내려놓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그때의 ‘내려놓는다’에서 이별의 느낌이 나진 않는다. 그때는 나무가 자기가 여름내 가졌던 것을 비우고 있다는 느낌이 난다. 나무는 잎을 떨어뜨릴 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대체로 떨어진다에서 시선이 멈추고 만다.
대상은 똑같지만 대상에서 무엇을 보았냐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 만약 나무에서 잎이 떨어질 때 이별을 보았다면 그 느낌은 당연히 ‘떠난다’는 말에 실릴 수밖에 없다. 난 오규원이 나무에서 잎이 떨어질 때 이별을 보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모두가 보았을 그 흔하디 흔한 장면에서 동시에 이별을 본 것이고, 그가 본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 바로 “잎이 가지를 떠난다”는 말의 탄생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인이란 표현에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멀쩡히 눈앞에 두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며, 그가 본 것을 그대로 옮기는 사람이다. 본 것을 옮겼으니 그들에게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상징이나 은유라기 보다 그냥 사실의 세계이다.
한 세상에서 여러 세상을 동시에 보는 그 눈이 나무에서 잎이 떨어질 때 가지를 떠나는 잎을 보자 그에 이어 나뭇잎이 떠나간 자리를 허공에 맡기고 있는 하늘이 눈이 들어온다.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는 우리에겐 빈자리이지만 그렇게 하늘이 나뭇잎이 떠나간 자리를 허공에 맡겨두면 그 자리는 빈자리가 아니라 기다림의 자리가 되어 버린다. 허공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자리를 맡아 다시 나뭇잎이 그 자리를 채우길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떠났던 그 잎의 자리로 다시 잎이 돌아올 것이며, 잎의 떠나고 돌아옴이 바로 하늘의 뜻, 즉 자연의 흐름이다.
모두가 시인일 수는 없다. 그러니 모두가 시인의 눈을 갖고 멀쩡히 눈앞에서 보면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적 감수성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들도 시를 누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법도 간단해서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고 그 시의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면 된다. 그럼 흔하디 흔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보고도 보지못했던 풍경이 보인다.
어느 날 남산의 언저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명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가을 단풍 두 개를 보았다. 그냥 지나치면 그건 분명 색이 다 바래도록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단풍잎 두 개이다.
나는 오규원의 시 「나무와 허공」을 끌고 그 자리를 지나친다. 그러자 이제 단풍잎 두 개가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서 단풍잎 두 개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번 맺어진 뒤로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진한 인연의 아쉬움이 만져졌다. 세상에 때되면 계절바뀌듯 쉽게 털어낼 수 있는 인연이란 게 몇이나 될 것인가. 가을이 지난 지 한참이 흐른 뒤였지만 그 아쉬움 앞에서 하늘도 아직 그들의 자리를 허공에 맡기지 않고 있었다.
**인용된 시가 수록된 시집
오규원 시집,『두두』, 문학과지성사, 2008
4 thoughts on “허공에서 기다림을 보다 – 오규원의 시 「나무와 허공」”
결국 직접 오시게 되었군요..
제가 요즘 졸업작품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바로 쓰러지고, 밤새고 그러느라… ㅠ.ㅠ
그러나 저러나 비행기표값이 너무 아깝네요.. ㅠ.ㅠ
그래도 고마웠어요.
돈을 어느 정도까지 들고나갈 수 있는지 알게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편하더라구요.
다행이 비행기는 싼 표가 있어서 아주 싸게 나갔어요. 갔다가 공항에서 곧바로 돌아와도 되는데 어떻게 될지 몰라 내일 돌아오라고 했어요.
앞으로 물어볼게 좀 많습니다.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아르바이트는 어떤 것들이 가능하고 보수는 어느 정도 가능한지 등등…
집팔아서 아이 공부시키고 시골로 가고 싶은데… 어머니랑 같이 살다보니 일방적으로 결정을 할 수도 없고… 일단 오토님께 유학생 사정에 대한 도움 말씀을 좀 듣고 싶습니다.
조만간 전화할께요.
아, 그리고 졸업 작품 잘하시고… 좋은 음악 만들어서 유명한 뮤지션 되길 빌께요.
아직 ‘가지’를 떠나지 못한 단풍잎 두 장이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그들이 떠나지 못한 것은 이별의 서러움 때문 보다는 ‘혼자’ 남겨질 나무의 빈자리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때로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할 때가 있지요. 인간이 삶의 혼돈속에 머물러 있을 때, 자연은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느껴요. 바로 저 단풍잎 두 장처럼…..
그래서 항상 천천히 거닐 게 되는 거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는. 빠르게 휙 지나치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놓치고 말거든요. 한참을 서 있다 가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