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휘닉스파크 스키장의 뒷산을 오르다 1

학교 다닐 때는
방학 때면 꼬박꼬박 고향에 내려갔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그다지 자주 고향으로 걸음하지 못했다.
내 고향인 강원도에 대한 추억은
역시 가장 선명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겨울과 추위이다.
3월 중순이면 서울에선 거의 눈을 보기 힘들었지만
고향 내려가는 길에선 그 즈음에도 버스가 원주쯤으로 들어서면
벌써 차창 밖으로 눈이 보이곤 했었다.
역시 강원도는 아직도 강원도인가 보다.
평창의 휘닉스파크로 내려가는 길에 보니
원주에선 차창밖으로 눈이 보이질 않았지만
횡성을 지나자 산에 온통 눈이었다.
사실 평창이라고 하지만 강원도에서 자란 내게 있어
휘닉스파크는 평창에 있다기 보다 봉평에 있다.
봉평이 평창에 속한 면이니 크게 보면 평창이지만
그곳의 바로 옆에 있는 영월에서 자란 내게 있어
그곳의 지명은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화되곤 한다.
그래서 난 평창이 아니라 봉평의 휘닉스파크에 다녀왔다.
스키장에 가서 스키는 나몰라라하고 그 뒷산에 올랐다.
혼자 산에 오른 3월 14일 아침의 강원도 봉평은 아주 날씨가 좋았다.

다음 지도 서비스 스카이뷰 캡쳐 화면

빨간 선은 올라갈 때의 대략적인 경로이다.
노란선은 내려올 때의 경로이며 스키장의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다.
올라가는 등산로의 거리는 5km 가량 된다고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간다.
눈덮인 스키장의 슬로프에 여름엔 풀이 자라는가 보다.
다져진 그 눈의 아래쪽에 풀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어젯밤 어둠에 묻혀있던 앞산이
아침에 깨어보니 골프장이다.
골프장과 산이 모두 눈에 덮여 있다.
흔히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지만
난 젊었을 때도 여행지에선 항상 일찍 잠이 깨곤 했었다.
그러니 늙어서 잠이 없어 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늙으면 집에 있어도 어딘가 여행지를 떠돌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6시 30분경에 잠에서 깨어
어디 혼자 갈만한 곳이 없을까 찾아보다
스키장 뒷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숙소는 인터넷도 되서 여러 모로 편리했다.
여행지에 와서까지 인터넷을 한다고 생각하면 삭막할 것 같은데
숙소의 앞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다르니까
인터넷을 하고 있어도 삭막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첨단도 자연과 잘 어울리면서 사용하니까
오히려 도시적 느낌보다는 자연의 느낌이 난다.
신기한 일이다.
오늘 돌아볼 곳들을 인터넷으로 대충 눈에 익혀놓고
카메라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Photo by Kim Dong Won

아침의 스키장 풍경이 궁금해서 스키장으로 가던 길에 보니
살짝 덮인 눈 때문에 앞산의 윤곽이
삼각형의 구도로 슬쩍 드러나 있다.
산에 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들 속에 산이 슬쩍 몸을 묻고 있는 듯하다.
나무는 혼자서는 나무 속에 나무밖에 담지 못하지만
나무가 여럿이면 그때는 그 안에 산도 담을 수 있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혼자일 때는 내 속에 나밖에 담을 수가 없는데
우리일 때는 가족을 담아낼 수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스키장에선 아침 일찍 슬로프 고르는 작업이 한창이다.
가파른 눈길을 연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스키장이란 것이 그냥 눈만 있으면 되는게 아닌가 보다.
즐거운 자리엔 항상 누군가의 노고가 있다.
스키장을 둘러본 뒤 산책로로 발길을 옮겼다.
산책로는 등산로로 이어져 있었다.
올라가다 잠시 후회는 했다.
그냥 산책만할 걸 하고.

Photo by Kim Dong Won

산길은 소리에 따라 그 맛을 달리하곤 한다.
잘마른 낙옆이 깔려 있다면
그 길은 바스락대는 길이 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경사도 급하지 않다면
터덜터덜 걸을 수 있는 길이 된다.
터덜터덜 걷는 길에선
길에 발자국 소리를 채우면서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소리로 따지면 눈길이 최고이다.
눈덮인 산길은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산길을 오르다 하늘 한번 올려본다.
구름이 지나고 있다.
구름을 잡으려 나무들이 일제히 팔을 뻗었다.
하지만 어느 나무도 구름을 잡지는 못했다.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가보다.
나무가 아무리 촘촘하게 팔을 뻗어도
구름은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근데 생각해보니
구름은 모두 뜬 구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라앉은 구름은 당췌 들어본 적이 없다.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Photo by Kim Dong Won

경사가 급한 곳엔 밧줄이 쳐져 있다.
하지만 이 밧줄은 보통 밧줄이 아니라 외유내강형 밧줄이다.
겉보기엔 다른 밧줄하고 똑같이 보이지만
잡는 순간 그 느낌이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밧줄이 얼어있어 마치 쇠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겉은 보풀이 일어있고 얼어있질 않아 아주 부드럽다.
겉은 부드럽고 속은 단단하니 외유내강 밧줄이 아닐 수 없다.

Photo by Kim Dong Won

아마 이 사진은 무슨 사진일까 싶을 것 같다.
산길을 오르는 동안 진달래 나무를 많이 만났다.
이 나무도 그 중의 하나이다.
대충 나무와 안면을 익혀놓으니
눈덮인 겨울 산길을 오르면서 분홍빛 봄을 꿈꿀 수가 있다.
봄이 오면 진달래가 아주 예쁘게 피는 산일 듯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산 정상에 가면 커피집이 있다고 들었다.
나무 사이로 스키장의 정상이 언듯보인다.
상당히 많이 올라온 듯한데 아직도 많이 남았다.
초보자들의 이용을 금지한 상급자용 코스쪽은
전혀 스키타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도 없는데 내려올 때 조기로 한번 굴러볼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난 종종 철없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래도 다행히 행동에 옮기진 않는다.

Photo by Kim Dong Won

올라가다 보니 나뭇가지에 가치집 같은 것이 보인다.
그런데 보통 까치집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짓는데
저건 까치집이라고 보기에는 가지 하나에 너무 아슬아슬하게 지었다.
아무래도 까치집은 아닌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자세히 보았더니 까치집이 아니라
중간중간에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싹을 낸 부분이다.
그러고보니 이 나무는 안면은 있는 듯 한데
나무 이름은 아직 모르겠다.
(댓글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 까치집 비슷한 것의 정체는
겨우살이라 불리는 기생식물이라고 한다.)

Photo by Kim Dong Won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팔을 뻗어 손끝을 맞대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하늘의 신이 땅의 아담과 손끝을 맞대는 그림이니
천지창조란 사실 하늘이 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모든 창조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무 두 그루가 손을 맞잡고 꿈꾸는 천지창조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여름에 오면 가르쳐줄께 하는 듯하다.
그래, 기회되면 확인하러 한번 와보지.

Photo by Kim Dong Won

요건 미완의 천지창조.
팔은 뻗었지만 손끝을 맞대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창조의 열정으로 팔은 계속 뻗겠지.
그런 열정만해도 그게 어디야.

Photo by Kim Dong Won

우리들은 끝말잇기를 하며 놀지만
나무들은 아침 햇볕이 나자 그림자 잇기를 하며 논다.
이 나무의 그림자를 저 나무의 밑둥으로 잇고,
저 나무는 또다시 그 그림자를 그 다음 나무의 밑둥으로 잇는다.
나도 내 그림자를 살짝 그림자가 모자란 부분에 보태주며 계속 산길을 올랐다.

Photo by Kim Dong Won

올라가다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려다보니
눈덮인 산의 윤곽이 산 아래로 하얗게 흐른다.
이 산도 봉우리가 하나둘이 아니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아이젠도 없이 올라왔는데 큰일났다.
그래도 눈길이어서 미끄럽지는 않았다.

Photo by Kim Dong Won

드디어 산의 정상에 왔다.
몽블랑이란다.
스위스라도 온 듯한 기분이긴 했다.
내가 항상 올랐던 한국의 산과는 다른 분위기인 것만은 분명했다.

Photo by Kim Dong Won

내가 두 시간여를 걸어서 올라온 높이를
빨간 스키복을 입은 사람이 스키를 타고 바람같이 내려간다.
그것도 상급자용 코스로.
나는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며 그 길의 풍경을 즐기고
젊은 사람들은 휘익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며 그 길의 속도를 즐긴다.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보니 좀 부럽기는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스키장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산과 눈높이를 맞추게 된다.
산의 이름은 태기산이라고 한다.
서울로 올라 올 때는 국도를 타고 이 산을 넘어 둔내까지 간 뒤
그곳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올라섰다.
풍력발전기 관리 때문인지 산꼭대기까지 길이 나있다.
다음에는 차몰고 조기도 한번 올라가보고 싶다.

Photo by Kim Dong Won

원래 계획은 걸어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올라온 반대편으로는 길이 완전히 눈에 덮여 있어 행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곤돌라좀 타고 내려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정상의 관리 직원이 선듯 그러라고 한다.
덕분에 곤돌라타고 내려왔다.
세상에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만 있고,
타고 내려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곤돌라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는 계곡에 눈이 하얗다.

Photo by Kim Dong Won

어지러운 스키 자국.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어지럽게 얽히는 속도의 세계를 즐거워하는 구나.
재미있긴 하겠다.

Photo by Kim Dong Won

다 내려와서
올라갔던 곳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아득하다.
저렇게 높은 곳을 곤돌라 덕분에 순식간에 내려왔다.
10분도 안 걸리는 것 같다.
원래는 빈 곤돌라만 내려오는데
사람이 하나 내리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눈치이긴 했다.
산에 가서 별재미를 다 맛본다.

15 thoughts on “평창 휘닉스파크 스키장의 뒷산을 오르다 1

  1. 강원도는 강원도네요.
    스키장이야 인공눈이라고 우기면 되겠지만
    돈벌이 되지 않는 산중에도 눈을 뿌렸을리 없으니
    강원도가 맞습니다.

    평창은 한여름에 가도 서늘한 기운이 있더군요.

    1. 오후에 대관령에 갔는데 눈이 어찌나 많이 쌓여있는지 한동안 녹기 어려워보였어요. 강원도의 봄은 언제쯤 오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2. 서울이 고향인 저희는
    떠날 때가 없으면 언제나 훌쩍 떠나는 곳이
    봉평 휘닉스파크랍니다

    동원님이 산이름 모르시면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태기산 맞답니다..ㅎㅎ
    태기산 더덕 드셔 보셨나요?

    몽블랑은 어딘가 이국적인 냄새가 나지요
    겨울 산을 어떻게 걸어 올라 가셨는지요?

    여름의 산도 아름답고요
    겨울은 스키로 즐길 수 있는 곳이랍니다.
    저는 봉평의 메밀국수랑 메밀전을 즐겨 먹곤 한답니다.
    효석님의 이야기는 안 쓰셨네요..ㅋ

    나무 사진이 너무 좋네요…!
    동원님의 시선이 남다름에 경이롭지요
    언젠가 쓰셨던 ‘나무들의 문’을 찾아 보셨는지요?

    1. 올라가다 후회좀 했지요.
      아이젠을 챙겨왔으면 아무 걱정이 없을텐데
      그냥 등산화만 신고 올라갔으니까요.
      내려갈 때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곤돌라를 얻어타고 편안하게 내려왔어요.
      그 나무의 문은 예봉산에 있는 것이었지요.
      진달래가 하도 많아서
      진달래 필 때쯤 한번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 스키장 주변 등산하고 오다… 확실히 특별하죠?ㅎㅎ
    정말 정상은 몽블랑이네요. 소박한 몽블랑.
    스키장에 두번 가봤는데,
    초보자는 스키신고 곤돌라에서 내리는거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상상을 했었는데,
    “곤돌라에서 미처 못내리고 그냥 그대로 내려가면 어떨까?
    앞으로 고꾸라져 떨어지진 않을까, 세찬 바람이 얼굴을 강타해서 걍 얼어버리겠지? 아미쿠 무씨..”

    저 까치집은 ‘겨우살이’가 아닐까요.
    그거 채집해서 약용에 쓴다던데.

    1. 스키 신고 내리는 사람은 없던데요.
      곤돌라 옆에 바깥으로 스키를 꽂는 곳이 있었어요.
      스키장마다 다른가봐요.
      리프트 타는 사람들은 스키 신고 타고 올라오더군요.
      곤돌라는 케이블카 비슷했어요.
      리프트는 공중에 매달아놓은 의자 비슷했구요.
      봉평은 여름에 가야 더 볼게 많을 것 같았습니다.

      아, 저게 ‘겨우살이’란 거군요.
      전 저것도 나무의 일종이려니 했어요.
      꽤많더라구요.

    2. 아! 맞다. 곤돌라 아니고 리프트..
      어째 저긴 케이블카처럼 생겼지 하면서 봤거든요.
      제가 스키장에 있는 곤돌라는 한번도 못봐서리 ㅡ.ㅡ

  4. 봄은 낮은 곳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산 위는 여전히 겨울이군요.

    철 지난 스키장에서 곤돌라를 버리고 눈길을 걸어 산을 오르는 느낌도 특별했을 것 같아요. 내렬 올 때는 아무도 타지 않는 곤돌라에 앉아서 산을 내려 오는 느낌도…
    위에서 보이는 어지러운 스키자국이 웬지 스산해 보이네요.

    1. 도착한 첫날은 어찌나 추운지 다시 겨울나라로 온 느낌이었어요. 둘째날도 바람이 엄청났어요. 근데 바람끝에 봄이 느껴지긴 했습니다.

      오랫만에 걷는 눈길이라 아주 좋았습니다. 올겨울엔 별로 눈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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